돌을 읽다/민병도
저문 날 강에 나가 징검돌을 건너다보면
세상 어떤 문자도 범접 못한 경전이 있어
누군가 물속에 숨어 지줄지줄 읽어 주었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달이 지고 날이 새고
바람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생살 깎아
시간의 지문에 갇힌 깊은 고요, 환하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고 말하지 않고
날마다 길을 버리면 스스로 길이 되나
밑줄 친 행간에 감춘 한숨마저 읽었다
시평
꽃이 핀다. 단단하게 다물었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었는데, 붉은 기를 머금은 이파리들이 몸을 일으킨다. 미심쩍은 듯 주춤거리던 행동이 어느 순간 자신감이 붙었는지 활짝활짝 몸을 뒤로 젖힌다. 화려한 자태, 카메라가 당겨 놓은 시간의 속도가 꽃의 생명을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영상은 꽃의 절정을 보여주고 나서 순간 거꾸로 돌아간다. 세상에 환호하듯 뒤로 젖혀졌던 이파리들이 허리를 일으키나 싶었는데 이어 날개를 착착 접는다. 화려함이 접히고 단단하게 뭉친 봉오리 하나가 남았다.
‘저문 날 강에 나가 징검돌’을 보는데, 난 왜 이런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겉으로 화려한 것들에게 시선이 끌린다. 말이 많아지고 미사여구가 횡행한다. 그러나 그 화려함을 품은 봉오리의 무거움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가슴에 품고 있는 것들이 많을수록 침묵하게 된다는 걸,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다.
‘시간의 지문에’ 스스로를 가두고 평화처럼 ‘고요’속으로 빠져들면 거기가 바로 환한 세상. 그러나 머리와 가슴 사이에는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어 ‘누군가’ ‘읽어 주’기 전에는 스스로 ‘범접하지 못하는 경전’이 되고 마는데... ‘생살’을 깎지는 못할망정 아주 작은 미풍에도 흔들렸던 하루를 마무리 한다. 흔들리던 시간이 피로감으로 쌓이고, ‘스스로 길이 되’려면 아직은 먼 ‘행간’에 서서 만지작거리던 길 하나 살며시 놓아본다. ‘밑줄 친’ 하루가 밤 깊숙이 파고든다.
-김연미 시인-
먹을 갈다보면/민병도
먹을 갈다보면 시간이 온 길이 보인다
아무런 의심 없이 몸을 섞는 물의 뒤태,
눈물에 발목이 잠긴 발자국도 보인다
창보다 예리하고 칼보다 날카롭게
붓끝을 기다리는 조선의 맑은 숨결,
민초의 잠든 새벽을 소리 없이 깨운다
아직은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경계,
모습도 색도 버리고 가만히 엎드리지만
어찌나 눈이 부신지 묵죽 저리 환하다
먹을 갈다보면 시간이 갈 길도 보인다
누구나 걸어가되 아무나 갈 수 없는,
함부로 맞설 수 없어 신발 벗고 가는 길
댓잎/민병도
칼을 간다
깊은 밤중에
달빛을
뿌리며 간다
누구를 치겠다고
병법마져 뒤적이는지
두어라
밤마다 치솟는 적의
서걱서걱
잘라낸단다
목련/민병도
그리움을 건너기란
왜 그리 힘이 들던지
긴 편지 쓰는 대신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사흘만
머물다 떠날
저
눈부신
적멸의 집
폐선/민병도
뜨겁게 끌어 안았던
강물을 뒤로 한 채
달빛만 가득 싣고
생을 마친 폐선 한 척
자신이
건너갈 것도 아니면서
강을 놓지 못하네
풍경/민병도
부처님 출타 중인 빈 산사 대웅전 처마
물 없는 허공에서 시간의 파도를 타는
저 눈 큰 청동물고기 어디로 가고 있을까
뼈는 발라 산에 주고 비늘은 강에나 바쳐
하늘의 소리 찾아 홀로 떠난 그대 만행
매화꽃 이울 때마다 경을 잠시 덮는다
혓바닥 날름거리며 등지느러미도 흔들면서
상류로, 적요의 상류로 헤엄쳐 가고 나면
끝없이 낯선 길 하나 희미하게 남는다
귀뚜라미 / 민 병 도
달빛 한 올 가로 넣고
별빛 한 올 세로 끼워
밤을 꼬박 새워가며
찌륵찌륵 베를 짜네
컹컹컹 개라도 짖으면
개소리도 함께 짜네
의자/민병도
누구를 기다릴까
꽃길 저쪽 나무의자
떨어진 꽃잎 몇 개
뒹굴다 떠나간 뒤
어둠이 하늘 문 닫자
별을 불러 앉혀요
하늘 공책/민병도
해가 쓰고 달이 지우는
하늘도 공책이네
섰다가는 지우고
지웠다간 다시 쓰는
엄마의 가계부처럼
더할수록 모자라는
소금/민병도
소금이 물이라네요
바짝 말린 바닷물
하나 둘 세엣 넷,
서로 잘난 모서리
거칠게 출렁거리던
파도 속의 하얀 뼈
보름달/민병도
외갓집 마당가에 깜박하고 놔두고 온
굴렁쇠가 따라와서 집까지 따라와서
내 작은 창문 너머로 꿀렁꿀렁 굴러가요
풀벌레/민병도
풀벌레는 잠도 없나
밤새도록 책을 읽어요
어떤 애는 국어책을,
어떤 애는 동화책을
별들이 말려보지만
들은 척도 않아요
옥수수/민병도
보는 사람 없어도
저들끼리 줄을 섰다
야단칠 사람 없어도
보란 듯이 줄을 섰다
이렇게 무더운 날에
결석도 한 명 없이
과감한 가을/민병도
노랗게 익은 모과가
툭! 하고 떨어졌어요
깨어질 줄 알면서
뛰어내린 모과를 들고
이것이‘과감'이란다
엄마가 말했어요
별/민병도
별들도 밤이 되면
집집마다 불을 켜네요
아빠가 오실 때까지
불 켜두신 엄마처럼…
별에도 늦게 돌아오시는
아빠들이 많나 봐요
나뭇잎 숟가락/민병도
나뭇잎은 숟가락,
햇살 곧잘 떠먹어요
반짝반짝 윤이 나게
배를 잔뜩 채우고선
졸음도 함께 먹었는지
숟가락 툭, 흘려요
코스모스/민병도
못 지킬 약속이면
아예 하질 말아야지
올해도 목을 빼고
길목을 지키는 꽃
바람도 신발을 들고
살금살금 지난다
꽃은 왜 아프지 않을까/민병도
언니가 꽃밭에서
꽃 한 송이 꺾어줬어요
피가 철철 나는데도
곱게곱게 웃기만 해요
꽃은 왜 아프지 않을까?
대신 내가 아파요
강물은/민병도
손에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 나란히 하고
흐르는 강물 앞을
돌이 가로 막았어요
강물은 화내는 대신
노래 불러 주어요
바람은/민병도
주머니에 봄을 감춘
바람은 외할머니,
외손녀가 기다리는
꽃밭까지 달려와서
까르르 웃을 때까지
곁에 앉아 기다려요
겨울 錦川(금천)/민병도
미처 떠나지 못한 길 하나가 물 속에 잠긴
겨울 錦川에 앉아서 물소리로 적막을 씻네
깃 다친 청동새 한 마리 軍裝(군장)을 벗는 저물녘
비정의 겨울을 온몸으로 증언키 위해
갈대는 선 채로 죽어 쓰쓰 싹싹 스크럼을 짜
가늠키 힘든 水深(수심)을 거울처럼 밝혀 놓았네
굽이쳐 온 지난날의 못다 아문 상처를 따라
속으로 울음을 삼킨, 삶은 다면 저 물길 같은가
初刊本(초간본) 옛 지도 위로 反逆(반역)의 뼈도 세우는
후렴뿐인 악보 하나로 강을 지킨 마른풀들
산빛을 꺾어 덮고 시린 어깨 뉘일 때
끊어진 징검다리를 건너 첫눈이 오고 있었네
민병도 시인의 겨울 錦川(금천)
1953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영남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마을'이 당선되고 1978년 ≪시문학≫지에 시 '기러기'로 천료하였다. '오류동인'으로 활동하였다. 2000년 예술창작공간 '목언예원'을 개원하였다. 현재 '시조21'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이호우ㆍ이영도 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 도서출판 목언예원ㆍ민병도갤러리 대표로 있다. 한국시조작품상ㆍ정운(이영도)시조문학상ㆍ대구시조문학상ㆍ중앙시조대상ㆍ 가람시조문학상ㆍ 한국문학상 ㆍ김상옥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설잠雪岑의 버들피리』 『갈 수 없는 고독』 『무상無常의 집』 『지상地上의 하루』 『슬픔의 상류』 『내 안의 빈 집』 『원효』 『들풀』등이 시화집으로 『매화 홀로 지다』 『흐르는 강물처럼』이 있다. 평론집 『형식의 해방공간』 『닦을수록 눈부신 3장의 미학』 수필집 『고독에의 초대』 『꽃은 꽃을 버려서 열매를 얻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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