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어 흔들리는 마음의 소리]
바람 소리 / 장진희
바람은 소리가 없지
바람이 지나갈 때
걸리어 흔들리는 것들의 소리
솔가지 바람 소리
대숲 바람 소리
오월 푸른
단풍잎 바람 소리
휘돌다 걸리어
빠져나가지 못하는
마음의 바람 소리
삼성각 댓돌에
넋놓고 앉아 있다
[세상의 모든 말들 묶어 두고 말간 숨만 나오라]
밤 비 / 장진희
세상의 모든 말들
떠도는 방
창호지를 때리며
밤새 굵은 비 내린다
자라
말들은 자라
숨결만 곱게 살고
물기 털고 날아오른
아침 새들이 부른다
불어난 개울물이
큰소리로 부른다
족쇄는 풀어서
세상의 모든 말들 묶어 두고
가벼운 발걸음만 나오라
말간 숨만 나오라
[마음은 천하호걸, 몸은 밴댕이 소갈딱지]
철없는 위장 / 장진희
밥때 되어
뱃속에서 꼬로록 소리 나는 거야
사람 짐승으로 태어났으니
탓할 게 없지만
이놈의 위장은
배 찼다 그만 신호에
개 주기도 어중간하니
딱 한 숟갈만 더
마저 먹었다고
언치어 끄윽끄윽 고생이란다
간밤에 나서 이슬에 큰 것도 아닌
몸뚱아리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을 일이지
어쩌자고 이리 까탈이냐
마음은 천하호걸이건만
몸은 밴댕이 소갈딱지로구나
[승복 입은 사람 하나 담배에 불을 붙인다]
바다와 스님 / 장진희
바닷가 몽돌밭에 앉아
승복 입은 사람 하나
담배에 불을 붙인다
바다에서 일어난 바람이
달려들어 먼저 태운다
늬들도 시름 깊구나
바다와 바람과 스님이
담배 한 대 나누어 피운다
[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
비 / 장진희
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
늙어가는 친구의 무릎을 거쳐
농기계에 치받치었던 농사꾼의 팔다리를 쑤시고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학교종에 쏟아져나온 아이들의 수돗가
웅성웅성 젖어 불은 소리
연탄가스처럼 낮고 무겁게 교실마다 퍼지고
기차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
남쪽 끝 항구도시 가득
먹장구름보다 짙게 깔리어
아이들의 닫힌 가슴에 덜컥 갇히고서야
하늘이 내 가슴을 누르네
작은새들 놀라 낮게 바삐 날고
꽃 피어 붉은
짙은 잎사귀 무거운 동백조차
통째로 흔들리는 판에
마른 풀대
거미줄처럼 걸쳐 있는 지난 가을의 넝쿨
모조리 흔들고서야
욕심 많은 절마당의 풍경소리 요란하게 울려퍼지고서야
마른 흙길
먼지 한 방울 훅 올라오다
기어이
후둑 후둑
후두둑
가슴에 먼지 풀풀 날리고 있었음을
이마 한가운데 빗방울 하나 툭
불현듯 놀라
멈추어
흙길처럼 내어놓는다
젖으라
흠씬 젖으라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좋은글 그리고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을 읽다/민병도 (0) | 2023.03.15 |
---|---|
이슬방울/최하림 (0) | 2023.01.14 |
매화시(梅花詩)/퇴계 이황 (1) | 2022.10.15 |
마음에 두지 말라/문정윤 수필가 (0) | 2022.10.12 |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마라/지지 않는 꽃/나태주 (0) | 2022.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