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성당 방현리공소
충청남도 아산시 방현동길 136-10(염치읍 방현리 54)
+ 마태오 복음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우상 -김용태 마태오 교구 정의평화위원장-
“한 시간 안에 끝내주세요!” 주일 10시 반 교중미사 후에 지휘자가 와서 그런다. 왜냐고 물으니 성가연습을 하려면 교중미사가 11시 반 이전에는 끝나야 한다는 거다. 평일에는 잘 안 모이니까 주일 교중미사 후에 연습해야 한단다. 그래서 물었다. “성가연습은 왜 하세요?”
가끔 본말 혹은 주객이 전도된 경우를 보게 된다. 미사를 위한 성가연습이지 성가연습을 위한 미사일 수가 없는데 이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처럼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경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런 모습들이 참 많다. 그리고 그중 많은 경우가 우리 삶의 목적이 되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심각한 결과를 야기한다. 학업이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인데 학생이 학업 때문에 자살하는가 하면, 돈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국가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인데 국민이 국가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목적이 되어 버린 수단’을 우리는 다른 말로 ‘우상’이라 부른다. 우리의 유구한 신앙전통 안에서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던 우상숭배의 죄란 한마디로 수단이 목적을 가리고 도리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우상숭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지는 걸까? 한갓 수단 때문에 소중한 목적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어찌 범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자신의 욕망이 수단에 투사되어 목적처럼 드러나는 것이고 둘째는 수단이 너무 화려해서 목적을 가려 버리는 것이다.
우상은 욕망의 결정체다.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재물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권한은 국민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 버리고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명예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자신의 값어치가 되어 버린다. 한편 우상은 늘 호화롭고 찬란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만일 그 손가락을 금은보화로 치장해놓는다면 사람들이 과연 손가락을 볼까 아니면 달을 볼까? 손가락을 바라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수단이 너무 화려하면 목적은 가려지고 수단만 보인다.
결국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려면 화려한 수단에 현혹되지 않고 목적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비움의 자세가 필요하다. 세례자 요한이 화려한 차림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아니라 초라하게 서있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스스로를 온전히 비우고 낮추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늘나라를 위한 회개’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동의 집>
우리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Laudato Si’ Movement(찬미받으소서 운동)에서는 매달 기도 안내를 제시해서 개인과 공동체가 공동의 집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의 지향은 선거와 정치 지도자를 위한 기도였는데, 특히 브라질의 대선과 아마존 보존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5초쯤 이게 뭐지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씀도 알고 있는데, 사실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참 멀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요.
기후 위기의 상징처럼 나오는 메마른 북극곰의 이미지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바로 이 자리의 위기를 멀리 대상화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북극곰의 위기를 북극곰‘만’의 위기로 바라보게 되면 지금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도심 속의 생활에서 소위 ‘작은 실천’만 하는 것 역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보면 식상해지거나 무기력 해지기도 합니다. 내 손은 동네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더라도 내 눈은 저 멀리 고통받는 피조물과 형제들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제 무얼하지?’ 라는 고민에 스스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유튜브에 공개된 ‘The Letter’에는 가난한 이, 토착민, 야생생물, 미래세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교황님이 편지를 보내 초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The Letter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 니다. 자동 자막 설정으로 우리말 자막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 역시 서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세네갈에서 온 청년은 마을이 침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합니다. 그가 아파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아파합니다. 세네갈의 아이들, 아마존의 토착민, 하와이의 산호, 인도의 미래세대가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공감 할 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봅니다. 함께하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요.
브라질의 대선은 룰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임 대통령의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 정책으로 훼손된 아마존이 얼마나 보존, 복원될지는 아직 두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좀 더 멀리 보고, 현실 정치에 눈을 감지 않을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둘 이상의 공동체를 이루어 고민하고, 회칙을 읽고, 실천하고, 이 연결을 바깥으로 더 많이, 더 멀리 뻗어나가도록 합시다. 서로가 서로의 벗이 될 때 우리는 희망에 차서 노래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찬미받으소서 118항).
-오현화 안젤라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28. 미사 해설 - 말씀 전례(4) : 말씀 전례 중 독서
모든 신자들은 “본기도”가 끝나면 자리에 앉고, 자연스럽게 말씀 전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 말씀을 듣게 되는데, “보편된 교회”라는 특성상 전 세계 어디에서든 같은 말씀을 전해 받습니다. 종종 신자분들께서 전례에 대해 질문을 하실 때, 미사 안에 말씀은 누가 정했는지 질문을 하시곤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69년에 발행한 「미사 독서 목록 지침」 (Ordo Lectionum Missae)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편 교회는 말씀 전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전례 주기에 따라 배정하는데, 미사 독서 목록 지침 66항에는 “주일과 축일의 미사 독서 목록”의 지침으로, 69항에서는 “평일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주일과 축일의 독서 목록 지침인 66항입니다.
(1) 모든 미사에는 세 독서가 있다. 첫째 독서는 구약에서 읽고, 둘째 독서는 사도서, 곧 전례 시기에 따라 서간이나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 셋째 독서 는 복음을 읽는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은 파스카 신비로 기념하는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난다. (2) 주일과 축일에는 3년 주기로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성경 독서를 배정한다. 이와 같은 배정으로 3년 마다 같은 본문을 읽게 된다. (3) 주일과 축일의 독서는 두 가지 원칙, 곧 ‘주제의 조화’와 ‘준 연속 독서’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배정하였다. 한 해의 여러 시기와 각 전례 시기의 고유한 특징에 따라 이 두 원칙을 적절하게 적용 하였다.” |
여기서 말하는 주일과 축일은 전례주년 안에서 성대하게 기념하는 날을 말합니다. 특히 3년 주기(가해, 나해, 다해)를 바탕으로 “주제의 조화”와 “준 연속 독서”의 원칙에 따라 독서를 배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제의 조화”는 어떤 형식으로든 서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읽는 독서는 분명한 연결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준 연속 독서”란 성경의 본문에 따라 진행되지만, 중간 부분을 건너뛰거나 생략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매주일, 그리고 매일 연속되는 독서라고 하더라도 그날 전례의 주제, 그리고 전례주년에 따라 생략되는 부분이 생긴다는 점도 참고적으로 알아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원칙은 전례주년의 흐름 안에서 명확히 적용되어 고정화되었습니다.
평일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은 69항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평일의 경우에는 두 가지 독서, 곧 구약을 포함한 신약에서 서간문을 중심으로 선택되는 첫 번째 독서, 둘째 독서는 복음을 선택하도록 인도합니다. 평일 미사의 독서의 배분 및 구성은 2년 주기(홀수해, 짝수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화답송”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 교구 내 공소
온양성당 방현리공소
1897년 방현리(쇠일)를 중심으로 43명의 공소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공세리성당 드비즈 신부가 방문하였다. 1914년 전후에는 옹기촌을 중심으로 전교가 활발하였다. 공소(연면적 69.42㎡)는 1975년 5월 27일 유재식 신부 재임 시기에 시멘트벽돌조로 건축되었고, 7월 1일 황민성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되었다. 부지(29평)는 박 노성(시몬) 초대 회장이 희사하였고, 건축비는 쌀 100가마(약 500만원)가 소요되었다. 건축은 조종구(다두) 목수가 맡아 시공하였다. 1980년경 본당구역으로 편입되어 공소예절은 중지되고 판공미사는 유지되어 왔으나 지금은 건물을 사용하지 않아 폐쇄된 상황이다. 약 7세대 5-6명의 신자들이 온양성당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45)>
알고 보면 다르지 않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시력 장애를 앓고 있는 할머니 두 분이 한 병원의 각각 다른 병실에 입원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분을 한 명의 간병인께서 번갈아 돌봐 드리게 되었습니다.
두 할머니께서는 앓고 계신 질병은 동일했지만, 그 병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분은 매우 긍정적이셨고, 다른 한 분은 매우 부정적이셨습니다.
날씨가 매우 좋은 어느 날, 할머니들을 돌보시는 간병인께서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하늘도 어찌나 맑은지 구름 한 점 없고.”라고 말을 건네면 두 할머니의 반응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긍정적인 할머니께서는 마치 하늘이 보이는 것처럼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래요? 다행이네. 진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라 참 예뻐. 이런 날 김밥 싸서 어디 놀러 가면 좋겠다.”
반면에 부정적 할머니께서는 인상을 쓰시며 버럭 화를 내십니다. “아니, 지금 누굴 약 올려? 내가 안 보이는 거 알면서 그런 얘기를 왜 내 앞에서 해서 남의 염장을 지르는 거야?”
그런데 신기한 건 두 할머니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분들을 돌보시는 간병인분의 태도였습니다. 그분은 두 할머니의 다른 반응과 관계없이 늘 온화하고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간병인이 그런 한결같은 태도가 신기해서 어느 날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부정적인 할머니한테도 어떻게 그리 똑같이 친절하게 대할 수 있나? 나 같으면 짜증을 낼 텐데...”
그러자 그 간병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긍정적인 분이나, 부정적인 분이나 알고 보면 똑같은 분이야. 두 분 모두 맑은 하늘을 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엔 다를 게 없으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태도의 다름보다, 속에서 일어나는 소망의 유사함을 발견하면 차별이 사라지고 그만큼 마음의 평화도 빨리 찾아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을 긍정적, 부정적이라는 범주로 나누는 오류를 범합니다. 물론 드러난 걸 기준으로 하면 그런 분류는 가능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걸 볼 수 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순응하는 사람이나 반항하는 사람이나 어쩌면 모두 맑고 파란 하늘을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옳은가로 보려 하기보다, 누구나 약하기 때문이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참 사랑의 시작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1분 교리>
Q-1) 예수님의 공생활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나나요?
A) 예수님의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부터 시작됩니다. 공생활은 기간으로 보면 삼 년이라 매우 짧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과 행적은 신앙인의 삶의 지침으로 평생을 이해하고 수행해야 할 정도로 방대하고 심오한 내용입니다.
주님의 공적인 생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있는 대로 십자가형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Q-2) 예수님의 공생활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나요?
A)여섯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시기 위한 복음 선포이며, 둘째는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가르침이며, 셋째는 그 나라의 오심을 드러내기 위한 기적의 베푸심입니다. 넷째는 그 나라를 드러내고 증거 하시기 위한 모범의 삶을 사신 것이고, 다섯째는 그 나라를 세상 끝날 때까지 이룩해 나가도록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신 일이며, 마지막 여섯째는 매일 매 순간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올리는 기도 생활입니다.
쓰레기 소각장 건설
수도권은 쓰레기 소각장 건설을 두고 주님들과 마찰이 심한 지경입니다. 기존 쓰레기 소각장에 추가로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노후화된 시설을 보완해야 하고 나오는 양이 더 많아져서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겠죠.
입장의 차는 누가 보더라도 이해는 되나 딱히 해결책이 없습니다. 내 집 앞에 이런 악취 나고 혐오스러운 시설물은 다들 싫으시죠. 누구나 그럴 겁니다.
쓰레기 매립장, 소각장, 하수처리장 등 우린 이런 시설을 혐오시설이라고 하고 내 주위에는 이런 시설물이 들어서는 걸 반대합니다. 그런데 쓰레기봉투에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60% 가까이 된다는 사실 알고 계시는지요? 우린 잘 모르겠고, 귀찮아서, 이래도 되는 줄 알고 등의 이유로 쓰레기봉투에 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같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 때문에 쓰레기 용량이 늘어나서 소각장을 더 크게 지어야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다시 쓰레기봉투를 열고 재활용이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분리하는 전처리시설을 두기도 하죠. 그러자니 음식물과 섞여 뒤범벅된 상태인 경우는 재활용도 어려운 상황.
'무슨 일이든 첫 단추가 중요해'라는 말 자주 들었습니다. 저도 매번 들었던 거 같은데요. 쓰레기봉투에 넣을 것과 넣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 우리 생활의 첫 단추가 되는 일 아닐까요?
-글. 사회복음화 분과 제공-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22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림 제4주일 2022년 12월 18일(가해) (0) | 2022.12.22 |
---|---|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2022년 12월 11일(가해) (0) | 2022.12.11 |
2023년 사목 교서 (1) | 2022.11.30 |
대림 1주일 2022년 11월 27일(가해) (1) | 2022.11.30 |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2022년 11월 20일(다해)/성서 주간 (1) | 202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