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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병사가 부모에게 보낸 6·25 전쟁 그림들..70년만에 공개

모든 2 2022. 4. 11. 11:04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인 로저 스트링햄(93)이 1951년 강원도 화천 일대 전투에서 연필로 그린 전투 스케치. 스트링햄은 최근 미 비영리단체 한국전쟁유업재단에 이 스케치를 포함한 60여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한국전쟁유업재단 제공·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미술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던 22살 청년 병사는 틈만 나면 강원도의 산과 풍경,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화폭에 담았다. 긴박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연필을 놓지 않은 것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무사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편지에 한 장씩 동봉한 6·25 전쟁 스케치는 60점이 넘게 쌓였다.

 

  이 병사의 집에서 잠자던 스케치와 그가 1952년 일본으로 재배치된 뒤 물감으로 다시 그린 수채화 등 6·25 전쟁을 다룬 작품 60여 점이 9일(현지시간) 미국 비영리단체인 한국전쟁유업재단(이하 유업재단)을 통해 7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유업재단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로저 스트링햄(93)의 작품들은 백병전, 참호전, 폭격기, 추락한 전투기, 야간 순찰, 병사들의 이동 등의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스트링햄의 말대로 전장 주변의 풍경에만 집중한 작품도 많다. 한국을 떠나면서 배에서 본 마지막 광경들은 일본에서 여러 점의 수채화로 재탄생했다.

 

  혼자 간직하던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 것은 현 거주지인 하와이에서 지난 2월 한종우 유업재단 이사장과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2012년부터 유엔 참전용사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진행 중인 한 이사장은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의 유해감식반 활동을 다루는 교육자료집 제작을 위해 하와이를 찾았다가 스트링햄과 처음 만났다. 마침 그림의 영구적인 보관 장소를 찾고 있던 스트링햄은 유업재단 홈페이지에 한국전쟁 스케치와 수채화를 전부 옮겨놓는 게 “최고의 선택”이라며 한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트링햄은 6·25 발발 후 미 육군에 징집돼 21보병사단 24연대 본부중대 소속으로 1951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강원도 화천호·금성 전투에 투입된 그와 동료 병사들은 혹독한 추위로 인한 동상으로 고생했다. 그는 이듬해 3월 부대가 일본 센다이로 재배치되면서 한국을 떠났다. 70년도 넘은 옛일이지만 스트링햄은 “아직도 죽은 동료들을 찾는 그런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전쟁 후 미국으로 돌아온 스트링햄은 물리화학을 공부해 100편 이상의 학술논문을 쓴 상온핵융합의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에서 열린 학회에도 여러 차례 초청받은 그는 “과거 완전히 부서진 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너무 놀랐다”면서 “인천공항, 서울의 마천루, 교통시스템을 보면서 ‘이건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라고 감탄했다.

 

워싱턴|김재중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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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인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대생 출신 미군 병사의 그림들이 70년 만에 공개됐습니다.

미 비영리단체인 한국전쟁유업재단(이하 유업재단)은 9일(현지시간) 참전 용사 로저 스트링햄(93)이 전장에서 그린 그림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미술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던 스트링햄은 미 육군에 징집돼 21보병사단 24연대 본부중대 소속으로 1951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그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틈만 나면 강원도의 산과 풍경, 미군 동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전선에서 종이를 구할 수 없어 맥주, 담배, 치약, 비누 등 보급품 상자 바닥을 뜯어내 연필로 그렸다고 합니다.

스트링햄의 작품들은 백병전, 참호전, 폭격기, 추락한 전투기, 야간 순찰, 병사들의 이동 등의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장 주변의 풍경에 집중한 작품도 많습니다.

그는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천에 내린 뒤 건물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해변에서 갯벌을 걸어 이동하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강원도 화천호·금성 전투에 투입됐을 때는 혹독한 추위로 동료들이 동상에 걸리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70년도 넘은 옛일이지만 스트링햄은 "아직도 악몽을 꾼다. 죽은 동료들을 찾는 그런 꿈을 꾼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림을 그린 또 다른 이유는 고향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있는 부모님께 "나는 괜찮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편지를 부칠 때마다 한 장씩 동봉한 한국전쟁 스케치는 어느덧 60점을 넘었고, 그의 모친은 이를 모아 1952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2년 3월 그의 부대가 일본 센다이로 재배치되면서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일본으로 재배치된 뒤 스케치 그림에 물감으로 색을 칠해 다시 그린 수채화도 있습니다.

전쟁 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전공을 물리화학으로 바꿨고 100편 이상의 학술논문을 쓴 상온핵융합 분야의 전문가가 됐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학회에도 여러 차례 초청받은 그는 "과거 완전히 부서진 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너무 놀랐다"며 "인천공항, 서울의 마천루, 교통시스템을 보면서 '이건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했다"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작품들을 혼자 간직하던 그는 지난 2월 한종우 유업재단 이사장과 인터뷰 후 이 작품들을 유업재단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2012년부터 유엔 참전용사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진행 중인 한 이사장은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의 유해감식반 활동을 다루는 교육자료집 제작을 위해 하와이를 찾았다가 스트링햄과 처음 만났습니다.

마침 그림을 영구보관할 장소를 찾고 있던 스트링햄은 유업재단 홈페이지에 한국전쟁 스케치와 수채화를 전부 옮겨놓는 게 "최고의 선택"이라며 한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진=한국전쟁유업재단 제공, 연합뉴스)
출처 :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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