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연탄곡이 흐르는 아침

모든 2 2022. 2. 25. 07:39

이제 연탄곡이 흐르는 거실에의 꿈은 완전히 사라진 걸까. 아도르노는 말한다. “연탄곡은 사라졌어도 어느 고독한 사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홀로 연탄곡을 치지만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악보를 넘겨주는 한 아이가 함께 있을 테니까.”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방학이 되고 나서 대학생 아이의 아침 일상이 바뀌었다. 아침마다 피아노부터 잠깐 두드리고 나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한때 피아니스트의 꿈을 지녔던 아이는 입시에 좌절한 뒤 과감하게 진로의 방향을 바꿨지만 피아노에 대한 애착마저 버린 건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병중의 무거운 마음도 아침마다 들려오는 아이의 피아노 소리로 행복해진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두배로 행복하다. 어쩐 일인지 아내도 건반 앞에 앉아서 아이와 함께 연탄곡을 치기 때문이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 그리고 파헬벨의 <캐넌 변주곡>.

 

연탄곡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말년의 아도르노 얼굴이다. 한때 아도르노 강의를 자주 할 때마다 수강생들에게 보여주던 사진이 한장 있었다. 그건 피아노 앞에서 홀로 건반을 누르고 있는 노철학자의 사진이다. 외롭고 쓸쓸하기는 해도 사진 속 대철학자의 얼굴에는 그가 평생 걸어온 지적투쟁의 족적들이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인간은 왜 문명의 끝에서 다시 야만으로 돌아갔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아우슈비츠 학살극의 기원을 묻고자 했던 <계몽의 변증법>, 그 치유와 대안의 철학으로 비폭력적 사유의 정초를 세우고자 했던 <부정 변증법>, 새로운 예술형식의 탐구를 통해서 권력과 지배가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상을 재현하고자 했던 <미학이론>에 이르기까지 아도르노가 비판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나날이 파시즘적 폭력 시스템이 되어가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가차 없는 비판 작업을 수행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냉엄하고 가혹하기까지 한 비판 작업 뒤에는 깊은 낭만주의적 동경이 침묵으로 존재했었다. 그건 그가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이상사회와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는 자율적 주체에 대한 꿈이었다. 그 유토피아적 세상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아도르노가 그 낭만적 현실을 가장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여준 건 난해한 개념들이 아니라 말년에 발표했던 <다시 한 번 연탄곡을>이라는 짧은 에세이 안에서다. 행복했던 자신의 유년에 대한 추억담이기도 한 에세이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거실에는 오래된 골동품처럼 낡은 피아노가 있었다. 어머니와 이모는 자주 그 건반 앞에 앉아서 연탄곡을 연주했다. 아직 악보도 읽을 줄 모르던 나는 어머니의 눈짓에 따라 가정용 연탄곡으로 편곡된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악보를 넘기는 일을 맡곤 했다. 어머니와 이모의 연탄곡이 흐르는 거실은 그때 내게 거실이 아니라 하나의 동화 세계였다. 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그 분위기가 아니라 어머니와 이모가 함께 연주하는 방식이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악보에 적혀 있는 음표들의 지시사항들을 정확하게 지켰고 그러면 그 규칙들이 두 사람에게 자기만의 독특한 감정들을 마음껏 표현하는 자유를 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연탄곡을 통해서 배운 건 음악의 기쁨만이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행복한 사회와 행복한 주체의 모습, 내가 꿈꾸는 미래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오늘 우리의 세상은 어떤 곳인가. 항공재벌의 족속들이 내지르는 분노 히스테리의 괴성, 기쁨조가 되기를 강요당한 여승무원들의 애교와 칭찬 소리에 우매한 고래처럼 기분이 들떠서 터트리는 또 다른 항공재벌 총수의 너털웃음, 마음껏 사랑하는 대신 마음껏 혐오하는 자유들만이 난무하는 양성투쟁의 고성들, 편의점 안에서 저마다 하루의 연명을 지키기 위해 맞서야 하는 을과 을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 

 

아도르노의 꿈은 악몽이 되었다. 세상은 연탄곡이 흐르는 거실이 아니라 사회도 주체도 없는, 오로지 강자의 파시즘적 폭력만이 지배하는 야만적 수용소가 되었을 뿐이다. 그 안에서의 삶은 매일의 연명을 위해서 투쟁하는 21세기적 파충류들의 삶이고 그 원시적 생존투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그러면 이제 연탄곡이 흐르는 거실에의 꿈은 완전히 사라진 걸까. 아도르노는 말한다. “연탄곡은 사라졌어도 어느 고독한 사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홀로 연탄곡을 치지만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악보를 넘겨주는 한 아이가 함께 있을 테니까.” 어느 아침에는 세상의 소음들로부터 한발 물러서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러면 한 아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무 지쳐서 꿈 같은 건 다 잊어버린 우리 안에서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꿈의 악보를 넘겨주는 늙을 줄 모르는 아이와 해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 특별히 행복한 건 오래 잊었던 이 아이에 대한 새삼스러운 기억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