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부드러운 악

모든 2 2022. 2. 25. 07:38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누구나 알듯이 아렌트는 악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종교가 상상했던 악이다. 중세가 사탄이라 명명했던 이 악은 특별한 악, 흉측한 악, 그로테스크한 악이었다. 그래서 뒤러는 그 악을 흉악한 용으로 그렸고 보스는 징그러운 곤충 떼들로 그렸다.

 

아렌트는 그러나 또 하나의 악, 현대의 악, 평범한 악을 발견했다. 현대의 악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도 평범해서 아렌트가 충격을 받았다는 아이히만의 얼굴처럼 범속하며 일상적인 악이다. 아렌트는 그 악의 평범성을 도덕이 상실된 현대사회의 징표로 보았다. 하지만 평범한 악이 오늘에도 유효한 악 개념일까. 아니면 그사이에 악은 더 진보해서 새로운 악의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일까.

 

사실 아렌트의 악 담론 뒤에는 서구의 도덕 철학적 전통이 있다. 칸트와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이 그것이다. 계몽주의자인 칸트에게 근대적 인간은 모두가 도덕적 주체였다. 계몽된 근대인은 보편 이성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다름 아닌 이 보편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한다. 그에게 나치의 가치관은 절대 보편적 가치였고 그래서 그는 그 보편주의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 법정이 새로운 보편 가치를 준거로 내세우며 그에게 죄를 묻는다면 그건 보편주의에 어긋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주장에 맞서서 아렌트는 새로운 도덕론을 제시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은 도덕적 행위의 준거를 보편 이성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개별적인 감수성에서 찾는다. 부당한 악행들 앞에서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건 보편 이성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도덕적 감수성’(moral sensibility)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보편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아이히만의 주장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비록 보편적 체제 안에 있었지만 그 체제성을 초과하며 언명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목소리를 그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기만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악도 진보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종교적 악을 평범한 악으로 대체했고 그 평범한 악을 다시 소크라테스의 양심 도덕론으로 방어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교적인 그러한 양심론이 간파하지 못했던 또 다른 악이 그때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그건 평범한 악과 도덕적 양심을 넘어서는 새로운 악, 즉 부드러운 악이었다. 예컨대 수용소에서 근무한 나치 무장 친위대(SS)들은 비합리적인 악인들이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를 잘 아는 합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너무도 합리적이어서 아렌트의 평범한 악에서는 구분되어야 했던 합리성-비합리성, 선-악의 경계선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었다. 모순과 갈등들은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의 내면에서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용해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화하고 부드러운 남편과 아버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 수용소장인 회스는 옥중 회고록의 말미에서 너무 공무에 열중한 나머지 가족을 등한시했던 일이 가장 한스럽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여자에 대한 사랑과 폭력 사이를 부드럽게 넘나드는 남자들, 돈과 복음 사이를 유연하게 건너다니는 자본주의 사제들, 약자들을 가엾어하면서도 내 동네로 들어오는 혐오시설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이비 시민들, 공적 권력과 사적 축재 사이를 넘나들었던 전임 대통령 등등의 사례들이 이 시대의 새로운 악, 유연하고 부드러운 악의 전형적인 얼굴이다.

 

여전히 상식처럼 회자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이 부드러운 악의 변신 앞에서 이미 시효를 다했거나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듯 악들도 빠르게 변한다. 랭보의 선언처럼 사유는 세상의 속도보다 더 빨라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세상 안에 팽배한 악의 세력들과 그나마 겨우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지난 20일 세상을 떠난 김진영 선생이 남긴 글을 계속 연재합니다. 아름다운 글을 남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