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 성 안드레아 성당(치유의 성모성당)
예수 수도회 신귀남 데레사 수녀
이일훈 건축가
건축가라는 직업은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생각을 그리는 존재이죠
집짓기 전에 생각이 먼저다.
삶의 방식을 결정하지 않고 짓는 집은 의미가 없다.
저는 건축보다 사람이 먼저다를 생각하는 건축가입니다.
불편한 건축이 곧 나쁜것이 아니다,좋을 수도 있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신학원 건축
가난하고 작고 겸손한 건축물
경당은 본건물과 많이 떨어져 있다.
장식을 거부하고 콘크리트 등 건축재료를 그대로 노출했다.
바깥의 비전례적인 공간과 안의 전례 공간을 연결했다 -소통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막고,
극도로 절제된 빛,유일한 자연요소인 빛만으로
영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지금은 물이 채워져 있지 않지만
연못은 물과 물에 비친 하늘 바람이 작은 우주를 이룬다
이작은 우주에 떠있는 묵상실
풍랑속의 방주이기도 하다
계단이 건물 밖에 있다
위험하지만 조심하고 깨어 있도록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하늘로 열린 기도 공간
그 당시 봤던 유럽의 건축물은 어떠셨어요?
30대초반부터 외국에 나가 건축사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절대 다수가 천주교 건축물이었다.
현대 건축물은 경의롭고 경탄스럽고 뒤돌아보면 우리나라 현대건축물의 실상 같은 것들이 대비가 되니까
부러운만큼 뒤돌아 보면 짜증이 나죠.내가 있는 자리의 건축물을 보면 우울하고,그러나 건축가는 그 땅과 그 시대와
호흡하는 존재인데 외국사람들은 근사한 건축물을 만드는 풍토에서 활동을 하는데 나는 왜 이런가 우리는 왜 이런가
이런 생각을 하면 굉장히 답답하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답답하다고 원망할 일은 아니고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견학고 공부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10년 20년 다니면서 경탄도 많이 했고, 탄복도 많이 했습니다.
딱 두군대 건축물에 대해서는 제가 울었습니다.제 건축답사,견학에서 두군데에서 울었는데 첫번째 82년도 쯤 프랑스의 롱샹성당 르꼬르 부제 선생님이 설계한 순례 성당 중의 하나인데 성당 규모도 크지 않습니다. 조그만한 동산 위에 있는데 르꼬르 부제 선생님은 건축적 논리가 탄탄한 분이시고 정말 거장이시죠. 그런데 르꼬르 부제 선생님의 다른 작품을 보고 울지는 않았어요.
그냥 경탄스럽고 경이로웠는데 롱샹에 가서는 제가 엉엉 울었습니다.
두꺼운 벽사이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한 빛이 들어오는데 와아~그리고 나서 한 10년 지나서 다시 갔는데 두번 세번 갔을때는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첫번째 갔을 때 롱샹 공간이 주는 힘이 가슴이 터질것 같고 저절로 눈물이 터졌다.
바로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안토니오 가우디 선생이 작업하고 지금도 백몇년째 공사중이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는 공간이 주는 힘에 울은게 아니라 그 열정 어떻게 건축물을 전 생애를 바쳐서 이렇게 작업할수 있나 이건 징그러운 인간이다. 거기서 나도 건축가인데 부끄럽고 나의 노력은 정말 하잘것 없고 형편없구나 자괴감 안토니오 가우디 선생의 열정에 대비되는 나의 못남과 자괴감 때문에 엉엉 울었어요. 몇달 지나고 가만 생각해 보니까 천주교 건물이 저를 울렸어요.
그러고 나서 한국순교복자수도회신학원 공사를 맡아서 좋았죠.
조금 불편하게 사는것이 건강에 좋고 특히 수도자에겐 영성에 좋아요.
종교나 신앙은 다 바람직한 편견 아니겠습니까?
마치 사랑처럼 마치 사랑이 당사자들한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외부인들이 보면 편견이거든요
그래서 바람직한 편견은 존중해야 되거든요 이해가 안되면 자꾸 이해할려고 하고 불교와 천주교를 등 비교하는 것은 제 인식 밖의 범위구요 천주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 정신 보편성 그것이 저를 많이 일깨우죠 직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건축가로서 해야 될일,건축가로서 세상을 보는 일,건축가로서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부분에서 많이 깨우치게 하는거 때문에 뭐 세상보고 사람보게 하는거니까 궁극적으론 불교랑 많이 통한다고 보죠.
건축가들이 고집을 내세운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경우고요
건축가의 고집은 다 소통된 후에 통한 후에 건축가에게 맡겨진 작은 역량을 잘 관철시키는 것 유지하는 거죠
건축가의 생각을 미리 정해 놓고 건축주를 자꾸 이끌어 갈려고 하는게 아니라 소통을 충분히 끝내 놓고 자기한테 주어진 자그마한 자율성을 통해 디자인을 완성하는거죠.
'잔서완성론' 송성훈 건축주,이일훈 건축가
사는 방식에 주목해야 잘 지을수 있다.
"채나눔"
인간,공간,시간
인간 -불편하게 살기를 추구하고
공간-외부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시간-늘려 살자
나뉘어진 것을 나누고자 하는 ‘채나눔’의 건축 모든 건물은 현실에 존재한다. 건축은 실재하는 추상이자 기술, 학술, 경제, 예술이다. 건축을 기술적으로만 분류하려는 이들은 사람이 그 안에 살기 때문에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공간에 사는 사람의 삶까지 포함하는 기술이 바로 진정한 ‘예술’이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삶의 방식을 함께 상의하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축은 한낱 ‘덩어리’일 뿐이다. 현대에는 집을 만드는 이나 쓰는 이 모두 욕심이 많아지고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 현대 건축은 지나치게 쓸데 없는 것이 많이 붙은 비만의 건축이고 탐욕의 건축이며 지나침의 건축이다. 그렇다면 어떤 건축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채나눔’의 건축을 제안한다. 채는 안채, 바깥채, 사랑채 할 때의 집을 세는 단위인 채를 말한다. ‘나눔’은 우리말의 ‘나누다’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누다’는 몇 개의 부분으로 가른다는 의미에서부터, 음식을 함께 먹는다, 말이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다,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함께한다는 의미까지 많은 뜻을 포함한다. 이처럼 ‘채나눔’은 복합적인 나눔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물리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서 안타깝다. ‘나누다’와 ‘나뉘다’가 혼용되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혼동과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나눌 것인가를 고민할 때 이 시대에 무엇이 나뉘어져 있는가를 봐야 한다. 요즘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양극화는 타의에 의해 경제적 지형이 ‘나뉘어진’ 것이다.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나뉘어진’ 경제 지형을 ‘나누는’ 지형으로 바꿔야 한다. 이처럼 ‘채나눔’은 나뉘어진 것을 나누고자 하는 건축의 지형이자 삶의 지형이다. 미래학자 앨빈토플러Alvin Toffler는 앞으로 큰 덩어리들은 작은 덩어리로 점차 나눠질 것이라는 ‘Mass To Demass’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mass가 완전히 사라지기는 힘들다. 효율적인 것은 mass로 가더라도, demass를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작은 언론매체가 좋은 내용을 보도하고, 작은 기업이 좋은 경영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상태이지 모든 기업이 demass가 될 수는 없다. mass와 demass가 공존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불편하게 살기 : ‘편하게 살기’라는 지형에서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가 생기고 있다. ‘편하게 살기’는 곧 ‘게으르게 살기’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편하게 사는 것을 지향하면서 환경 오염, 질병, 운동부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는 ‘편하게 살기’라는 지형에서 나왔다. 편안한 집을 찾을 것이 아니라 건강한 집을 찾아야 한다. 건강한 집은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고, 사람이 살기 좋은 공간이지 게으르게 살게 하는 집이 아니다. 불편하게 살 줄 알아야 한다. 여름에 시원하게, 겨울에 따뜻하게 보내려는 욕구가 존재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름에는 덥게, 겨울에는 춥게 살자. 밖에 살기 : 공기가 순환되지 않는 곳에서의 모든 웰빙Well-Being은 사기이다. 안Inner Space에 살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은 건축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 그 후유증을 낳고 있다. 사람들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몰고 회사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일주일 내내 안에서만 살다가 자연을 잊고 살았구나라고 반성하면서 ‘차를 몰고’ 교외로 간다. 안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요즘 친환경, 웰빙 Well-Being 자재가 유행하는데 막힌 공간에서의 친환경, 웰빙 자재는 모두 ‘사기’이다. 오늘의 집은 인간과 자연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팬티바람으로 나갈 수 있는 외부공간이 집에 있어야 한다. 잘게 나눈 공간 사이에 외부 공간을 개입시켜서 ‘밖’에 살자. 우리에게는 외부를 인식하고 외부와 관계 맺을 수 있는 내부가 필요하다. 늘려 살자 : 두 발 거리를 다섯 발 거리로 늘려 살자. ‘늘려 살기’는 ‘느리게 살기’와는 다르다. 느리게 사는 것이 시간과 인간의 문제라면 늘려 사는 것은 공간과 인간의 문제이다. 근대 이후 건축의 목표는 공간을 ‘확장’ 시키고 동선을 ‘축소’ 시키는데 있었다. 짧은 동선이 합리적이라는 의식 아래 사람들은 모든 움직임을 최대한 좁은 공간에서 해결하려 한다. 같은 면적의 공간을 사용할 때 넓게만 만들려고 하지 말고 좁은 공간 여러 개를 연결시켜라. 공간 사이사이 늘려진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이 함께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고 사유와 의식의 폭이 확장된다. 두 발 거리를 다섯 발 거리의 공간으로, 될 수 있는 한 늘려 사는 건축이 이 시대에 너무나 절실하다. ‘놀이’를 할 수 있는 ‘심심한’ 놀이터를 만들자 동네마다 어린이 놀이터가 없는 곳이 없다. 그리고 놀이터마다 뜀틀, 시소, 미끄럼틀, 정글짐 등의 놀이기구가 꽉 차있다. 나는 이런 놀이기구들을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놀이의 유형마저 똑같아지는 한 이 아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상상력은 없다. 무진장 심심한 기구와 심심한 작대기 몇 개 놓아 두고 모래만 깔려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이 심심함에 지쳐서 창의적 놀이를 스스로 개발하도록!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상상력 넘치는 어른이 될 것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공원들은 잘 가꿔진 나무와 세련된 조형물로 꾸며져서 멋있어 보인다. 나는 역시나 심심한 공원을 제안한다. 조경업자에게 많은 이익을 주는 단풍나무가 서있고, 비싸고 매끈한 돌이 깔린 공원 대신에 맨바닥에서 자연 번식한 풀이 자라 있는 심심한 공원이 필요하다. 공원은 작더라도 가까이 있을수록 좋다. 멀리 있는 큰 공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심심한 공원들을 집 사이사이에 두고 살자. 생명체의 관계성을 차단시키는 식물원과 동물원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전 국토가 테마파크로 뒤덮이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각종 식물원과 동물원들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식물원은 식물의 상품성과 개체성만을 내세우고 관계성을 말살시킨다. 동물원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진짜 흥미로운 것은 동물끼리의 관계를 보는 것인데 이것이 사라진 동물원은 말 그대로 ‘쌩쇼’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서 즐겁게 동참할 일이 아니다. 환경과 자연을 보는 애완적, 감상적 시각을 버리고 ‘관계성’을 살려야 한다. 친환경은 무드Mood가 아닌 삶에 맞닿은 실제 친환경, 웰빙의 삶은 경제적 능력에 비례한다. 황토집을 짓는 것이 생태적인 삶은 아니다. 싼값으로 황토집을 지으면 결국 ‘흙색 페인트’를 칠할 수 밖에 없다. 환경적인 것은 왠지 허름하고 옛스럽게 보이는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실제의 문제이다. 친환경은 돈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제대로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재료 자체에서 오는 감각만 따졌을 때 인공재인 철판은 반反환경적이다. 그러나 철은 재생이 가능하므로 친親환경적이기도 하다. 진짜 황토로 만든 집은 허물면 다시 흙이 되기 때문에 황토는 친환경적이다. 그러나 물에 약한 황토집은 일년에 한 번씩 수리해줘야 하는데 이 작업이 번거로워서 황토에 인공 첨가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토의 호흡하는 기능이 사라지고 반환경적이 된다. 모든 자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친환경, 반환경적 측면을 갖게 된다. 콘크리트는 이 시대에 가장 싸고 보편화된 자재이다. 멋으로 쓰려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재료이다. 콘크리트를 쓰는 경우는 이것이 최고의 해법일 때이다. 그 집에 살게 될 사람의 경제적 문제를 이해해 주는 것 또한 건축가의 몫이다. 값싸고 수명이 긴 콘크리트는 집을 보수 관리 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재료가 된다. 아무리 친환경적인 집을 지어놓아도 보수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미 집이 아니다. 과거에는 오래가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자재였기 때문에 황토로 집을 지었다. 시대에 따라 자재가 갖는 경제적, 기술적 보편성으로서 현재의 콘크리트는 타당하다. 재료에는 우열이 없다. 저마다 타당하고 장단점이 있다. 어떻게 사는가를 묻는 것이 건축이다 건축의 지형과 삶의 지형은 결국 같다. 어떻게 사는가를 묻는 것이 건축의 문제이자 삶의 문제이다. 지형을 해석하고 그 지형에 대응하는 사람들은 순응하거나, 반항하거나, 개선하려 하거나 모두 제 각각이다. 억지로 한 덩어리가 되게 하려는 지형을 나눠서 소통할 수 있는 지형으로 바꾸자. 식물원, 동물원, 놀이터, 공원, 콘크리트 집 모두 소통과 관계의 지형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본질적 관계’를 살려내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
채나눔 건축가 이일훈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신학원 (경기도 가재리)
1992년,교회 건축물로는 처음인 작품
이일훈 건축가
'불편하기 살기의 철학이 있다
유럽의 교회 건축사에 대해 많이 공부했고
한국순교복자성직 수도회와 인연을 맺은 후
성당 등 교회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저는 무뚝뚝한 공간들이 생명력이 길다고 생각하는데
건축의 공간이나 형태가 유행을 따라가면 유행이 바뀌면 갑자기 촌스러워지거든요
무뚝뚝한 사람들은살밥,보리밥,맨밥 같아서 70년 먹어도 안 질리잖아요
선생님은 일관성 있는 작품성이 있으신지요?
첫째는 공간이 무슨 용도 무슨 기능으로 쓰이느냐는게 일차적 문제아니겠어요 그런데 일차적인것 넘어서 건축가가 제안하는 기능으로 제가 어떻게 각색 하느냐 연출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죠.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굉장히 주목하죠
창문의 위치, 공간의비례,사람이 움직이는 동선,사소한 것 같은걸 가지고 굉장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죠
건축사무소 이름
후리(逅理) - 제가 건축디자인을 평생하다가 문득 이치하나 깨치면 좋겠다는 제 소망을 담은 이름입니다.
연구실 이름
지벽간(紙壁間) - 얇은 종이 두장으로 만들어진 공간,가장 가볍고,가장 깊고,가장 그윽하고, 종이 두장 사이의 공간
그 공간에 모든 것을 담고 싶은 간곡한 소망 때문에 혼자 지벽간 되뇌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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