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사랑의 잔상
- To Thee -
전시에 관하여
전시는 늘 첫사랑 같은 것이다. 전시 사진을 고르다보면 생각지 않은 것들을 만난다. 항상 사진과 텍스트는 나의 작업의 화두이다. 텍스트를 읽는 일은 사진만큼이나 소중한 아카이브작업이다. 찍지 않으면 만날 수 없듯이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먹고 자고 사랑하고 일하는 기본적인 삶에서 책이란 반드시 읽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책이 주는 힘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책이라는 텍스트에서 시작되어 책 이야기로 끝나는가 싶다. 전시는 3개의 섹션으로 나눴다. 첫 번째는 연인들에 관하여, 두 번째는 생의 한순간 스쳐간 사람들에 관하여, 세 번째는 책 속에서 마주쳤던 ‘사랑의 잔상들’이다.
사진과 텍스트는 서로 다르지 않다. 시인이자 18세기 문학비평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은 문학이 미술보다 우위에 있는 예술임을 논증하려 했고, 미술사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은 ‘라오콘의 조각상’을 통해 고대 그리스미술의 위대하고 고귀한 미적 위상을 찬양했지만. 오늘날 레싱의 구분은 모호해졌다. 그림이 언어로 대체되고 시가 그림으로 형상화되고, 작가가 쓴 문구가 작품이 되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상호작용은 개념미술의 도입 이래 소피 칼(Sophie Calle)과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élix González Torres), 로니 혼(Roni Horn) 등을 통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작품 속에 전하려는 메시지를 중시하는 작가들에게 텍스트는 매우 매력적인 소재이다. 다양한 언어, 시 구절, 익숙한 단어와 문장, 개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텍스트는 무엇이든 작품이 될 수 있다. 다양한 메시지를 담은 텍스트는 각기 다른 형태로 곳곳에 등장한다. 이미지에 글을 직접 써넣거나 책 속의 글씨를 가져와 문장을 만들고, 거대한 전광판에 LED 조명으로 글씨를 밝히거나 텍스트를 적은 보드를 길 위에 세우기도 한다.
이번 나의 전시에서도 각 작품 섹션마다 텍스트가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동일한 등가이다. 읽을 수도 있고 이미지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지를 보고, 텍스트를 본 뒤에 이미지를 다시 보는 것이 관람의 즐거움을 배가할 것이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의 전시 소감은 소설가 이승우의 <소설가의 귓속말>에서 가져와야 할 것 같다. 1980년대에 20대 청춘기를 보낸 나로서는 이성복과 최승자와 이승우를 지나칠 수 없다. 그들의 슬픔에 찬 텍스트들은 지금의 내 영혼에 숨결을 보태주고 근육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텍스트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읽혀질 때 의미를 연다. 텍스트는 읽는 이의 세계관과 경험과 인식의 통로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보지 않는다고 거기 있는 것들이 달라질 리 없지만 보지 않으면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눈길을 끄는 이미지를 본 뒤, 다시 곁들어진 텍스트를 본다. 텍스트를 본 관객은 다시 이미지를 보며 생각하게 될 것이다. 텍스트는 이미지의 방향을 제공해주고 이미지는 텍스트를 이끌어준다. 텍스트는 이미지 속에서 관객들의 각기 다른 사유 속으로 미끄러진다.
익숙한 것을 경계한다.
첫사랑의 기억처럼 첫 기억은 번갯불처럼 강렬하고도 선명하여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경험의 종류와 경험의 양에 상관없이 이전의 일들이 되풀이이고 인생행로를 바꿀만큼 획기적이지 않게 되면서 무던해지고 무심해진다. ‘여유있고 부드러워진다’는 말에 유혹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익숙하고 누구를 만나도 설레지 않고 무엇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경지로 빠져들게 된다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경험들이 반복되면 유형화에 갇혀버릴 위험이 있다. ‘그저 그렇지’ 하는 심리, 비슷비슷한 것들을 유형화시켜 같은 것으로 규정해버리려는 유혹이다. 설렘이 없는 세계는 빛이 없다. 그저 생기없는 사물처럼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푸네스의 기억법
보르헤스의 주인공 푸네스는 자기가 본 순간의 어떤 것들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한다. 같은 나뭇잎이라도 빛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나뭇잎이 된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을 그런 나뭇잎이다. 일반화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나뭇잎’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일반화와 추상화를 통해서 ‘비슷한 것’을 ‘같은 것’으로 규정하기보다 ‘비슷한 것’을 ‘각기 다른 것’으로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삶이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푸네스는 그렇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사물과 현상을 집중하였다. 그러느라 외부의 소란에 참여하지 못했다. 발견한 것과 발견할 것에 몰두하느라 그는 고독했고 고독했을 것이다. 사진도 그러할 것이다. 고독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정희#1 사랑의 재발명 35cmX35cm, inkjer print
사랑의 재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나라도 곁에 없으면/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취해 말했지/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사랑의 발명/이영광). ‘사랑’한다는 일은 무신(無神)의 시대에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이다. 한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라니. 오늘날 에로스는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정한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정희#1-2 나만의 아리아드네, 40x40cm, inkjet print.
이정희#2 16개의 계단이 있는 풍경 -미친 사랑의 노래(Mad Girl’s Love Song), 160X240cm, inkjet print.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외연도의 밤에 찍은 누추한 가옥 16개의 계단은 실비아 플라스의 닫혀버린 사랑을 닮았다. 그토록 당당했고 용감했던 여자. 명문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 뛰어난 시인도 결혼 제도의 틀을 넘지 못하고 사랑의 지옥 앞에서 죽음을 택했다. 사랑이란 강력한 트로이조차 잿더미로 만들 만큼 위협적이다. 메데이아는 아버지의 나라를 애인에게 바치고 아리아드네는 미궁의 전설을 청년에게 누설한다. 사랑에는 수없는 의심과 두려움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사랑은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것이지만 사랑은 늘 변질된다.
이정희#3 세계의 기원: Bed, 120X216cm, inkjet print
세계의 기원: Bed, 120X216cm, inkjet print
푸코는 도시의 ‘모텔’을 ‘환타지 공간으로서의 헤테로토피아’라 명명한다.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이 은밀하게 깃드는 곳, 익명이어야 할 이들이 잠시 안식하는 공간이다. 사랑은 평범한 시간이 신의 경지를 체험하는 특별한 것이지만, 그토록 특별하고도 영원한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사랑도 평범한 인간사에 불과할 뿐임을 알게 된다. 꽃이 지는 것처럼 정한 이치이다. 인간이 신이 된 시대에 사랑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당신의 눈동자/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이 됐었지//당신의 무릎/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으나//오늘은 잘 모르겠어//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무릎은 가만히 펴졌지//거기까지는 알겠으나/새는 다시 날아오나//신은 언제 죽나/그나저나 당신은…….” -오늘은 모르겠어/심보선-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없는 십오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심보선의 시에서)
이정희#4 세계의 기원 소년 소녀를 만나다, 40X60cm, inkjet print
세계의 기원 : 소년 소녀를 만나다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푸른 물살을 헤엄쳐 갔다
-첫사랑/진은영-
이정희#5 연인들 100x150cm, inkjet print.
연인들 : 사랑 예찬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되는 장애물들을 끝없이 단호하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육체의 결합으로 하나가 된’이라는 시적 개념은 하나의 기만이다. 바디우는 ‘남녀 간의 사랑’을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라고 말한다. 진리란 ‘혁명’이고 ‘기존의 지식체계의 교란’이며 ‘차이를 통한 같음’으로 가는 일상적이고 위대한 진리 체계가 사랑이다. 남녀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수많은 우연이 운명으로 고정된다. 인생의 운명적인 순간에 늘 사랑이 존재한다. 바우디의 사랑은 "내 삶을 도려낼 때 사용되는 칼이 바로 그대"라는 카프카의 사랑의 상처와는 정반대의 사랑법이다.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시인의 사랑/진은영
이정희#6 오랜 후에- To Thee, 110X85cm, inkjet print
오래된 후에
사진은 정지된 순간, 과거와 바라보는 자의 현재와 사라질 미래를 동시에 담는다. 사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매 순간 부재한다. 사진 속에 있는 그들과 나,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와 사랑하는 나의 언니. 우리는 이제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동지였던 그들도 더 이상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만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때/나희덕
이정희#7 오래된 후에-스쳐간 사람들, 40X40cm, inkjet print
사진은 정지된 순간,과거와 바라보는 자의 현재와 사라질 미래를 동시에 담는다. 사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매 순간 부재한다. 사진 속에 있는 이들과 바라보는 나, 우리는 이제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움이다. '오랜 후에'시리즈는 나의 언니와 어머니와 아버지, 한때의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의 편지다.
이정희#8 오키프의 사랑법1 100x75cm, inkjet print
조우1 : 오키프의 땅
오키프의 사랑법
Both side now –조니 미첼의 노래로 대언하다
Bows and flows of angel hair/and ice cream castles in the air/and feather canyons everywhere,/I've looked at cloud that way/But now they only block the sun,/They rain and snow on everyone/So many things I would have done/but clouds got in my way//I've looked at clouds from both sides now,/from up and down, and still somehow/It's cloud illusions I recall/I really don't know clouds at all//....I've looked at love from both sides now,/from win and lose, and still somehow/It's love's illusions I recall/I really don't know love at all...//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now,from give and take, and still somehow/It's life's illusions I recall/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이정희#9 마리서사에서1, 240X120cm, Inkjet print
마리서사에서
마리서사에 들어섰다.
김진영선생의 이별의 푸가
에곤실레가 쓴 시같은 에세이 한권,
줄리안 번스의 미술에세이 한권,
김연수가 쓴 시절일기
심보선의 시집 한권
캐서린 잉그렘이 쓴 앤디워홀의 뒷담화 책 한권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를 품에 들고 왔다
이정희#10 아니 에르노의 열정 40X30cm, inkjet print.
'관심있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군 병사가 부모에게 보낸 6·25 전쟁 그림들..70년만에 공개 (0) | 2022.04.11 |
---|---|
귓전 명상 (Healing Meditation) (0) | 2022.03.07 |
나이 들수록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0) | 2022.03.07 |
‘갑천 자연하천구간‘을 국가습지로 시민과 함께 만들자! (0) | 2022.01.23 |
건축가 이일훈 (0) | 2021.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