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1년 주보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2021년 10월 24일(나해)

모든 2 2021. 10. 24. 13:50

 

모산성당 매곡리공소

충청남도 아산시 매곡로 87-11(탕정면 매곡리 639-3)

 

+ 마태오 복음 28,16-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향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 이한영 마르코 내동 주임

 

  우리는 보통 서양말 "미션"의 뜻을 "선교"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션"의 본뜻은 "선교(전교)"가 아니라 "보낸다""파견한다"는 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가서 세례를 주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제자들도, 지금의 사제들도 2000년 동안 성찬례를 거행한 후에 "ite missa est 이떼 미사 에스트(보냅니다.)"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보낸다"는 말을 오랫동안 반복하다 보니 아예 "보낸다(미션)"는 말이 보내는 목적인 "선교"라는 말이 된 것이다.

 

  미사가 끝났으니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 먹고, TV연속극도 보고, 스포츠 중계도 보고, 낮잠도 자고, 운동도 하고.. 그런 거 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쁜소식을 전하고 가르치라고 심부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 중에 미사를 드리고 나서 심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늘 미사 분심 없이 잘 드렸다.", "미사를 드리고 나니, 오늘 의무를 다한 것 같아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다."며 그냥 집에 돌아갈 뿐이다.

 

  엄마가 애한테 심부름을 보냈다.(미션을 줬다). "얘야, 지금 아빠가 몹시 아프시니 빨리 약국에 가서 약 좀 사오너라!"그런데 이 녀석이 집을 나서다가 친구들을 만나, 노는 데 미쳐서 심부름을 잊어버리고 그냥 빈손으로 집에 들어왔다. 정신 빠진 그 녀석, 아마 '엎드려뻗쳐'벌 받거나 죽도록 매를 맞을 것이다.

 

  우리들, 미사 끝에 항상 심부름을 받는다. 미션을 받는다.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신자들은 미사 끝에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았습니다.!!" 큰소리로 꿀떡 같이 대답하고 집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마시고, 놀고, 싸우고, 욕하고, 낮잠 자고... 그리고 시간이 되면 또 와서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다 심부름을 받고... 또 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또 미사에 오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어떻게 될까? 엄마 심부름 안 한 아이처럼 죽도록 혼나거나 쫓겨나거나 하지 않을까???

 

   우리들,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선교(전교)를 해야 한다.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지키고 전해야 한다. 그 친구, 성당에 다닌다고 하는데, 기도하는 모습, 성당 다니는 모습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직장에서 갑질하고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행동을 보면 진상인데... 성당은 열심히 다닌다.?! 그러면 선교가 되겠는가? 말과 행동으로, 언행일치의 삶으로 신앙인의 삶을 보여 줌으로써 복음 선포 사명을 수행하도록 합시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정의를 이룹시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2007년부터 '실질적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되지만 법률적으로는 아직 사형제가 유지되고 있는 국가이다. 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첫째, 사형은 이미 우리 헌법상 (헌법 제10조: 제12조 1항; 제37조 2항) 보장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전제가 되는 생명권을 박탈하는 형벌이다.

 

  둘째, 사형은 생명권 침해를 비가역적으로, 즉,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형벌이다. 혹 오판이 이뤄질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다. 징역이나 벌금을 오판할 경우, 어느 정도 보상할 수 있지만, 사형은 그런 여지조차 없기 때문이다. 혹여 억울한 사형의 경우, 죽은 사람을 되돌려 보상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예를 들면, '인혁당 사건', '이춘재 사건(화성 살인)',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등과 같이 여러 오판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실제 사법의 오판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미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은 우리나라 법관 중, 35%가 한 번 이상의 오판을 경험했음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건 정리위원회]로 법원에서 유죄확정판결을 받은 사건 중 진실을 규명하여 재심을 권고한 42건 중 18건이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자들을 바라보면 사형제도의 존속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미 사형제도는 일반범죄 예방률에 효과가 없으며, 범죄 억제력과도 관련이 없음이 드러나 있다. '우리의 정의'로는 '응보주의', 곧 흉악범에게 사형제만이 정당한 듯 보이지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겠다. "사형은 오리혀 사형수에게 짧은 공포와 고통을 주지만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는 크지 않다. 사형은 공포감을 주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하나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성의 측면에서 종신노역형이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평생 저렇게 비참하게 사는 구나!'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키며 범죄자 본인에게도 지속적인 고통이 될 수 있다."[베카리아의 지속성 논리, 범죄와 형벌]

 

  여기에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을 떠올려 보자. 카인은 아우를 살해함으로써 평생 그림자를 안고 살면서 죽은 형제와 화해하지도 못한 채 평생 살아가게 됐다. 화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생 살아야 할 두려움을 지닌 채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화해를 이루지 못한 자로 살아가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살인자이지만 그가 인격적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몸소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비록 카인은 '놋 땅'(창세 4,16) 곧 결핍과 고독의 땅, 하느님과 단절된 곳으로 쫓겨나 세상을 떠돌아다닐 운명에 놓이게 됐지만, 여전히 하느님께서는 그를 굽어 보고 계셨다. 여기서 세상의 정의와는 다른, '하느님의 자비로운 정의'가 드러난다.(「생명의 복음」,9항 참조)

 

  "어떠한 생명도 죽이지 않고 모든 사회의 선을 얻을 수 있도록 각자의 존엄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2019년 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사형 폐지 총회에 보낸 영상 메시지)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교회음악 이야기④

 

하인리히 비버 <묵주기도 소나타>

 

수줍은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의 밤, 고즈넉한 낙엽내음 스민 10월의 밤, 성당 마당에 모여 여럿이 함께 바치는 묵주기도 소리는 지친 맘을 달래주는 위로와 힘을 지닌다. 비록 지금 그 아름다운 시간에 가까이 모일 수는 없지만 서로 같은 음악을 들으며 묵상하고 위안을 삼아 본다. 1676년경 독일의 작곡가이자 비르트오소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하인리히 비버(Heinrich Ignaz Franz Biber, 1644-1704)는 <묵주기도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비버가 <묵주기도 소나타>를 작곡했던 시기는 반종교개혁운동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묵주기도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공고히 하기에 충분한 심심행위이자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통하여 가톨릭의 교리를 뚜렷이 드러내내는 신앙의식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묵주를 지닌 마리아의 모습은 마치 반종교개혁 시기의 클리셰(chiche)와도 같았다. 이와 같은 열풍을 불러일으킨 묵주기도를 기악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은 몹시 희귀하지만 그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 비버의 <묵주기도 소나타>이다.

 

  사실 비버의 악보집에 제목표지는 사라지고 없지만 각 신비가 시작되는 모든 악보에 좌측 <그림>과 같은 동판화가 새겨져 있어 <묵주기도 소나타>라는 이름을 갖기에 충분하다. 바이올린과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이 곡은 환희의 신비, 바이올린과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이 곡은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각 5곡씩, 무반주 바이올린 파사칼리아( passacaglia)를 포함 총 16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스코르다투라(scordatuta)라는 독특한 조율법으로 완성되어 각 신비의 내용에 맞는 특별한 음색을 지닌다. 또한 음악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방법이 탁월한데 <그림, 영광의 신비 1단), 소나타 1 번 '수태고지'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의 준엄한 메시지와 마리아의 응답, 소나타 2번 '엘리사벳을 찾아 가심'에서는 태중의 아기가 뛰노는 모습, 소나타 11번 '부활'과 12번 '승천',14번 '성모승천'에서는 북소리, 트럼펫 소리를 연상시키는 환호가 가득하다.

 

  비버의  음악은 종종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 눈앞에 만들어 내는 창조의 능력이 절정에 이른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특히 소나타 11번 '부활'의 경우, 청각적 효과뿐 아니라 물리적 악기의 세팅에서도 십자가의 영광이 드러난다. 즉 실제 악보에 표기된 방식으로 악기를 조율하면 바이올린 브리지에서 가운데 두 현이 X자 모양으로 엇갈리며 십자가 형태를 띤다. 이처럼 <묵주기도 소나타>에서 비버가 사용한 다양한 조율 방식은 마치 "각자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와 같다. 깊어가는 가을밤 <묵주기도 소나타>를 들어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비밀의 열쇠를 찾아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오주현 헬레나 음악학자-

 

 

* 교구내 공소

모산성당 매곡리공소

  1954년 홍순교 모이세 초대 회장집에서 공소예절을 시작하였다. 1961년경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입.수리하여 집회공간을 마련하였다. 1968년- 1969년에 전교 수녀의 파견 활동으로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현재의 공소는 1981년 이종석 베드로 회장 재임시기에 본당지원,교우들의 봉헌과 노력봉사로 시멘트벽돌조(105,79㎡)로 건립되었다. 2006년에는 제단부 뒤편에 다목적 회의실을 증축하였다. 공소는 본당구역으로 편입되어 월 1회 공소예절을 갖고 있다. 건축 당시 92명에 달했던 교세는 현재 24세대 15명으로 감소되어 공소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유학 사제들의 편지⑦>

 

옹졸한 이에게 주어진 위로

 

 안녕하세요! 고국에  계신 형제 자매님들께 인사 드립니다. 저는 정무범 요셉 신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상처를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전해 주셨던 참 평화(참고: 요한 20,21), 기쁠 때 뿐만 아니라 어려울 때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를 간직하실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며 기도드립니다. 이는 저 자신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 로마 유학 사제 공동체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여 생활 나눔을 하고, 미사를 함께 봉헌합니다. 어느 날, 이 모임의 미사 중 한 신부님의 강론말씀이 기억에 남아 그때 느꼈던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 강론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막에 와 있습니다. 언어의 사막이지요." 그러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공동의 어려움과 희망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직 이태리어 걸음마 중이던 그때의 저에게 이 강론 말씀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힘내!'라는 응원보다 나의 형제들이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제게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웃의 고통에 위로 받는 제 모습에 죄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제게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나와 함께하는 이가 있다는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언어의 사막에는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하는 것만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서 오는 불편함 등등, 이러한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부족함은 제게 갈증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은 저로 하여금 한 모금의 물에도 더 민감하게 기쁨을 누리도록 해 주었습니다. 우리말로 미사를 할 때, 한식을 먹으며 오랜만에 형제 사제들과 담소를 나눌 때 등등, 한국에 있을 때에는 쉽게 누려왔던 것들이 언어의 사막에서는 오아시스처럼 다가왔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우리'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한가운데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저는 줄곧 제가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먼저 제 곁에 와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와 저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상처투성이의 몸을 하고서도, 제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고 찾아와 당신의 평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바라보며 위로 받던 옹졸한 마음 안에도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다른 이의 고통에 위로 받던 저를 위해 당신의 상처로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평화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생활 나눔을 마치며 다시 한번 형제 자매님들께 기도를 청합니다. 우리가 겪는 사막이 서로 다르더라도, 같은 분을 향한 우리의 동행이 무사히 예수님 안에서 마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정무범 요셉 신부 로마 유학-

 

 

 

 

오늘은

 

제각기 걸어가며

향기를 내는 것

 

삶에서 꿈을 만드는 것

꿈처럼 살아내는 것

 

주님께 한 발

다가서는 것

 

그 향기를 널리 퍼트리는 것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고기 좋아하시죠?

 

  고기 정말 좋아하시죠? 아침에 밥을 잘 안 먹는 저희 아이들도 소불고기 반찬이 있으면 앉아서 한술 크게 뜨고 학교를 가니... 고기는 정말 좋은 반찬일 겁니다. 또한 고기 메뉴로 하는 요리 프로그램들은 너무 잘 만들어져서 육즙이 흘러나오는 찰나를 순간 포착해서 찍어대는 카메라맨과 편집 기술은 우리를 고기의 매력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고기를 한 쌈 싸서 먹는 개그맨들의 모습은 정말 입에서 군침을 돋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육식이 앞으로 큰 환경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이하 KBS 환경스페셜

  '달콤. 살벌한 고기 한 점' 10월 14일 (목) 밤 8시 30분 KBS 2TV 바야흐로 '육식의 시대'다. 우리의 한끼 밥상에서 고기가 빠진 모습을 더 이상 상상하기 힘들다. 세계의 육식 소비량은 점점 증가하고 있고, 고기를 얻기 위한 경작지는 그만큼 더 넓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기후 위기의 징조가 포착되고 있고, 세계의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육식 위주의 식단이 전 지구적 기후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매년 증가하는 세계의 육식 소비량, 2018년에는 육류 소비량이 3억 톤에 이르렀고, 2050년이 되면 5억 톤에 이를 전망이다. 늘어나는 수요만큼 소를 더 키워야 하고, 소에게 먹일 사료용 곡물도 더 재배해야 할 상황. 결국 소고기를 얻기 위해선 점점 더 많은 땅이 필요해졌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려온 세계 최대의 열대 우림인 아마존, 그리고 세계 최대의 습지인 판타나우에서는 언젠가부터 숲이 불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고기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불을 지르는 것, 거대한 숲이 구획된 경작지로 변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해자일지 모른다.

 

 대규모의 축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분뇨들을 배출하고 이는 주변 생태계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 또한 사료의 재료가 되는 곡물을 키우기 위해서 광범위하게 살포되는 농약은 땅에 스며들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이를 식수로 마신 주민들은 심각한 질병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환경실천 운동의 시작은,

저는 먹거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가해자입니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먹거리에서부터 찾아가심은 어떠신지요!

 

-글. 사진 사회복음화분과제공-

 

 

<1분 교리>

 

1) 전지전능하신 신(神)을 우리는 어떻게 부르나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다스리시는 분을 영어로는 'God', 한자로는 '천주(天主)님', 한국 표준어로는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은 하늘을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만물의 으뜸으로 여겨왔기에 신을 가리켜 '하늘'의 존칭어인 "하느님"이라 불러왔습니다. 한자의 '천주(天主)님'역시 '天'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조선 후기부터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번역된 호칭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하느님께는 '하나'가 뜻하는 유일성 외에도 무한성과 영원성, 진리이시며 지혜자 이신 절대자로서의 속성이 있으므로 어원상 '하나님'보다는 '하느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맞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속성을 지니신 분을 '하느님'이라 부릅니다.

 

-교육분과 제공(김동규 신부님 예비자 교리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