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2010년 12월 5일(가해)

모든 2 2021. 9. 17. 07:54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 마태오 복음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라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 안상철 미카엘 성환 주임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회개하여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회개는 따로 구분하여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최악에 찌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준비 행위란 곧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고 또 행동으로 변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의 회개보다 남의 회개를 대신해 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잘못을 질책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말하기보다 남의 잘못을 쉽게 말하고 과대 포장하여 선전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타인의 습관이나 단순한 실수까지도 헐뜯고 비판하는 마당에 어떤 잘못을 발견하면 훨씬 훌륭한 판단의 요리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판단하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니 너희는 판단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잘못을 판단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웃의 잘못이나 실수나 부족함은 나의 판단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해야 할 의무와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어야 할 의무만이 있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로마 15,7)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가족, 내 공동체와 다르다고 하여, 또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살아주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지독한 이기주의의 울타리를 스스로 치는 것일 뿐입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거룩한 대림절 동안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며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려  노력한다면 가장 큰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도의 재미있는 속담 하나를 소개합니다.

  "만인 그가 그의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는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게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하고,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고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 라 하고,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고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친절하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내 유쾌하고 좋은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하고,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가!"

 

 

<시니어 칼럼>

 

지상에서 하늘나라 건설하기 -주거 보장-  한성동 갈리스토. 노인사목부 전담 신부

 

  안전하고 편안한 주택을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은 소득 보장의 욕구와 적절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주택은 인간 생활을 담는 하나의 그릇이다. 특히 노년기에는 사회적 관계가 가족을 중심으로 축소되고, 생활의 주 공간이 주택이 되기 때문에, 노년들의 주택에 대한 욕구는 일생의 생활주기 어느 시기보다도 강하다.

 

  주거시설의 형태와 질과 위치는 노인의 신체적 독립성, 안전성, 사생활의 보장, 사회적 관계와 활동의 참여, 노인복지 서비스의 접근 등에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 노후 생활의 전반적인 만족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다.(Lsrson,1978) 인간의 주거권 즉 주택의 거건과 주거환경을 향유할 권리는 197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 구체적인 입법을 통하여 인정되고 보장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거권이라는 용어는 법률사에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헌법의 간접적 의미와 국제규약을 인정하고 사실로 미루어 적어도 선언적 의미에서 주거권이 인정되고 있다 할 수 있다.

 

  2002년 4월 8일~12일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UN주관으로 제2차 세계고령화 총회(The Second World Assembly on Aging)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논의된 노인 정책 중의 하나는 각국 정부는 노년들에게 편리한 주거환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년기에 주택이 주는 의미와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택은 노인의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서 생리적인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먼저 충족시켜야 하는데 주택은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주된 수단이 된다. 노년기에는 신체적 심리적 기능이 약해지므로 안전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주택의 필요성은 커진다.

 

  둘째, 주택은 노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산이며 경제적 보장의 효과를 높여주는 것이 된다. 개인과 가족의 생활에서 주택 구입이나 임대는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어려운 일 중의 하나다. 또한 주택은 임대를 통하여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셋째,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정체감의 상징이 된다. 노년기에는 직업 역할이 상실되어 직업 역할을 통하여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정체감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적합한 주택의 소유나 적합한 주택 상태의 유지를 통하여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정체감을 나타내고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년기에 주택이 가지는 사회 심리적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주택의 소유는 자신의 신체적 경제적 독립과 사생활의 자유를 공간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이 타인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나아가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냄으로써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사생활의 자유를 공간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주거 공간을 확보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섯째, 노화로 인하여 생활 기능 저하를 보완하고 수용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노년들에게 적합하게 설계된 주택은 노화로 한 일상생활 기능의 저하를 보충하고 수용해 주는 물리적 환경을 조성해 주고, 노인 자신뿐만 아니라 노인을 보호, 수발하는 가족을 포함한 보호자에게도 편리성을 제공해 주면, 나아가 여러 가지 물리적 장애로 인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해 준다.(최성재, 2010)

 

  따라서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주거공간을 확보해 주고 주택을 통한 삶의 질을 높이려는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주택의 수요와 공급을 민간차원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본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가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지혜로운 정책을 통한 민생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일은 지상에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하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행복 나눔을 "한 생명축제"에서  - 김영우 시몬. 전민동 성당

 

  얼마 전 탄방동 성당에서 열린 "한 생명축제"에 우리 부부도 참석했습니다. 대전교구 114개 본당과 24만여 신자들,275명의 사제를 중심으로 펼친 '한생명운동"의 6천여 명의 장기기증 희망자와 헌혈자 중에 우리 부부도 포함되었다 하니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는 마치 잔잔한 바다에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이 밀려와 마음속에 어둠을 씻어 내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자존심을 바치고 싶게 만드는 행복한 마음에서 아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께서는 격려사를 하시던 중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내시더니 "생명 나눔 운동"신분증을 보이시며 '나도 이 자리에 올 자격이 있습니다"하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이 나의 눈에는 곧 하느님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짧은 한평생에 이 같은 기회를 포착하기란 그다지 쉽지도 않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잘 받아드리고  잘 판단한다는 것도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찬 서리 내린 아침 산책길을 걸으면서도 플라타너스 낙엽이 길 위에 뒹굴고 있음을 보고도 발길을 옮겨 밟은 작은 생각에도 깨끗한 마음으로 푸른 색깔을 입혀 하느님께 이 몸 봉헌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사실 우리 부부도 "한생명 운동"에 동참하기란 그다지 쉬운 여건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4대 독자이시고 자식의 대를 이르려 아들만을 그렇게 기다렸는데 위로 딸만 넷을 놓고, 뒤 늦게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특별히 경주 김가의 자손으로 위풍 있는 가문에 종손인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기대가 컸으리라 추측이 갑니다.

 

  이에 반하여 저에게도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아들만 넷을 두어 거룩한 혼배성사로 일곱의 손주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는데 자기기증은 그다지 쉬운 판단은 아닌 결단이었습니다.

 

  이웃과 우리 식구들은 저의 결단에 적극 동조하며 하늘에 먼저 가 계신 선친 "도밍고"와 "에와"께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교구설정 70주년을 향하여 복음 선포에 앞장서 나가는 대전교구에서는 전체의 4%에 해당하는 신자들이 한생명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나 전국적으로인 통계로는 1.4%하고 하니 미국의 30%, 영국의 28%에 비하면 너무나 소극적이라 생각이 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10) "한생명축제"에서 권고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동참한 우리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고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부지런히 걸어온

 

당신

당신의 그 모습을

사랑합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타인과의 단절, 그게 곧 지옥이다!!!

 

흔들리지만 가라앉지 않게 하소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삐에르 신부님은 「단절된 기쁨」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때때로 타인은 지옥인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육체적 휴식을 취하고 나면 그 고통이 풀리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죠. 인간 관계는 한 번 꼬이면 그 순간부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는 듯 하죠.

 

  달력 한 장을 남겨 둔 이 시점에서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는 일 년 동안 무엇 때문에 흔들렸을까?" 역시 일보단 사람 때문에 더 많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럼,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얼마나 가라앉았을까 또 곰곰이 반성해 봅니다. 타인 때문에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 때문에 타인과 단절하고자 했다면 그건 가라앉은 겁니다.

 

  누군가 미워졌다고 그 사람을 외면하기란 참 쉽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린 삐에르 신부님의 말씀대로 진짜 지옥 같은 고통 속으로 가라앉는 거 아닐까요? 그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 때문에 내 영혼이 침묵한다면 그건 그 사람과 함께 동반 자살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 아닐까요?

 

  "흔들리지만 가라앉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2월은 타인과 함께 고통의 나락으로 침몰하기 쉬운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흔들리면서도 가라앉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비법을 전해주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달입니다. 동방박사가 발견한 별빛을 볼 수 있을 만큼만 흔들리고, 꼭 그만큼만 가라앉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주님의 은총이란 생각이 오늘도 전 흔들리지만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고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