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연중 제21주일 2010년 8월 22일(다혜)

모든 2 2021. 8. 28. 16:4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참조)

 

 

+ 루카복음 13,22-30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조규식 세례자요한 자양동 주임

 

  신앙인들은 언제나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열심히 기도한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망덕송) 연중 제21주일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서라"(루카 13,24)라고 가르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그 나라에 들어가지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간청해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외적인 특권이나 지위와 관계 등이 아니라 오로지 참다운 회개의 실천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 의미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처럼(루카 18,9-14 참조) 그 순서가 바뀔 수 있다고 하는 다음 구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들만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 이사야 예언자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도 전한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이사 66,21)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12,60라고 가르치며 모든 훈육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준다고 일깨워 준다.

 

  우리는 흔히 구원의 문제를 먼 훗날의 일로 미루거나 바쁜 일상생활 안에서 잊고 살아간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되새기며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하느님께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해야 하겠다.

 

 

<시니어 칼럼>

 

노년기의 성격적 특성  -한동성 갈리스토. 노인사목부 전담 신부

 

  성격이란 특정한 개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독특한 방식을 말한다. 이는 사람의 기분. 태도. 의견을 포괄하며,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성격은 각 개인의 특징을 나타내는 선천적. 후천적 행동특성으로, 그 사람의 주위환경과 사회집단의 관계 속에서 관찰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성격은 성인기 이후 거의 변화가 없이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한다는 주장과 상당한 정도로 변화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변화에 힘이 실리고 있는 추세이다.(Woodruff & Birren, 1983; 윤진 1984) 노년기의 성격적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울증 경향의 증가 : 우울증 경향은 노년기 전반에 걸쳐 증가한다. 신체적 질병, 배우자의 죽음, 경제적 사정의 악화,사회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및 고립, 일상생활에 대한 자기 통제의 불가능,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 등이 원인이 되어 우울증이 증가한다. 우울증이 증가하면, 불면증, 체중감소, 감정적 무감각, 강박관념, 증오심 등의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울증은 개인의 적응능력 수준에 따라 정도가 다르며, 전혀 우울증 현상이 보이지 않는 노년도 많다.

 

  2) 내향성 및 수동성의 증가 : 노화에 따라 관심과 주의를 외부의 사물이나 행동보다는 내면적인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보나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하게 되는 경향이 많아진다. 노화에 따라 모든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약해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수동적으로 해결하거나 신비적으로 또는 우연히 잘 되도록   내맡겨버리는 경향이 증가한다.

 

 3) 경직성의 증가 : 경직성은 융통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어떤 문제해결에 있어서 그 방법이나 행동이 옳지 않거나 이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익숙해 있는 습관적인 태도나 방법을 고수하고 이를 여전히 계속되는 행동의 경향을 말한다. 경직성은 노화에 따라 증가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경향은 노인의 학습능력과 문제해결의 능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경직성은 노화 이외에도 문화적 및 경험적 요인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유연성이 있는 문화나 사회 속에서는 경직성이 둔화될 수 있다.

 

  4) 조심성의 증가 : 조심성 증가에는 세 가지 이론이 있다. 우선 노인 스스로의 의지로 정확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둘째, 시각 청각 등의 감각능력 감퇴를 비롯한 신체적 심리적 메커니즘 기능이 쇠퇴한 결과 부득이 조심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노인의 경우 결정에 대한 자신감이 감퇴하기 때문에 확실성을 높여야만 결정이 용이해진다. 따라서 확실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조심성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년들은 정답을 말하기보다는 오답을 말하지 않기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여론조사에서 무응답 또는 모르겠다는 응답에 표시를 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5) 유산을 남기려는 경향 : 노년이 되면 자기가 죽을 때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들이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자손, 예술 작품이나 문학작품, 독특한 기술, (영적인) 교훈, 부동산, 돈, 때로는 아름다운 기억 등이다. 노년기에도 자신의 삶의 결과물을 남기고 싶어하는 바람의 표현이다.

 

  6) 의존성의 증가 : 노년들은 신체적 및 경제적 능력의 쇠퇴로 인하여 의존성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Blenkner에 의하면 노년의 의존성은 네 가지로 들고 있다. 경제적,신체적,중추신경의 쇠퇴로 인한 정신적 의존성, 생활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중요한 사람을 상실함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의존성, 그 외에도 심리적 정서적 의존성이 커지는 시기이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좋은 몫을 택하여라 - 홍정희 베로니카.송촌동 성당

 

  "오늘 처음 나온 자매님 자리에서 일어나 보세요."

  선교사님이 말씀하시자 많은 눈길이 내게 쏠렸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교사님이 말씀하셨다.

  "갑자기 저녁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곳이 신의 성당이 맞느냐고 묻더군요. 우리 공소 교우목소리가 아니기에 누굴까 생각했지요. 미사를  드릴 수 있느냐고도 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공소전례에 오셨네요.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길 바란다면 방법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피서지에 가도 성당은 있습니다. 마치 오늘의 복음 말씀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여겼던 마리아를 두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성당에 찾아가기엔 녹록치 않았다. 마을버스를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초행에 도보는 무리였다. 신앙 활동으로 주변 분들에게 폐를 끼칠 마음은 더욱 없었다. 그 가운데 주일 아치마다 성당 봉고차가 마을 어귀를 지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교구 홈페이지에서 전화번호를 찾아보았고, 그렇게 선교사님과 통화할 수 있었다. 주일에 미사를 드린다는 기쁨에 전화를 끊자마자 슬리퍼를 신은 채 마구 뛰어다녔다. 다음 날 아침, 공소, 전례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성당 봉고차 안에서 선교사님이 말씀하셨다.

  "자매님으로 인해 저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통하여 저희에게 오신다더니, 자매님의 모습을 통하여 제게 깨달음을 주셨나봅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찾으며 사랑하고 다가가는 모습을요. 공소전례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숙연해져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 뒤로 하느님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차에서 내린 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드렸다. 하늘이 참 맑았다.

 

  동행했던 지인이 천주교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던 기억이 난다. 하느님 얘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나를 응시하던, 궁금함이 가득한 지인의 표정도 떠오른다. 본당에서 개최한 민들레 선교 기본교육 중 가슴에 콱 박힌 구절이 있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통해 흐르는 은총을 보기만 해도 선교는 저절로 된다.'

 

  하느님께 다가서는 내 모습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일까? 좋은 몫을 택했으니 얼굴에서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나를 상상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어떤 몫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 가지만을 필요로 하길 원하신다. 걱정과  염려가 아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우리의 모습을 하느님을 흡족하게 할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다른 이들도 하느님 곁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리아를 보고 남 모르게 가슴으로 다짐했듯.

 

  저녁 미사를 갈까 고민하는 내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듯하다. "사랑하는 내 딸아, 좋은 몫을 택하여라."

 

 

 

지금은

내 영혼 일깨워

 

호흡하는

시간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노친이 퇴원 다음날 주신 용돈

 

지난해 11월 초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노친을 입원시켜놓고 일시 집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병원에서 가져온 노친이 옷가지들을 받아 세탁기에 넣으려고 호주머니들을 뒤지던 아내가 봉투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5만원권 지폐 한 장과 1만원권 지폐 열여덟 장, 23만원이 들어 있는 봉투였습니다. "이건 어머님 돈이니까 넘보지 마세요." 마누라는 단호한 소리로 못을 박았습니다. "아쉬울 땐 일단 쓰고 봐야지, 뭐." 나는 항의의 뜻을 표했지만 언감생심, 마누라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나는 그 돈 봉투를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 돈 봉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건 마무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 부부는 건망증 쪽으로도 부창부수, 일심동체의 경지를 보이니까요. 하여간 그 후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태안의 서해안 요양병원으로 옮겨오신 노친은 기적같이 완쾌되어 마침내 7월 5일 퇴원하여 집으로 오셨습니다.

 

  집에 오신 노친은 다음날 당신 방의 '기도상'앞에 앉아 기도를 하다가 성모상 뒤에 검은 비닐봉지가 접힌 채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봉지 안에 든 것이 돈 봉투임을 확인하고는 내게 얼마인가 세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23만원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돈이냐고 물으셔서 나는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보다가 학교에 가 있는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지요. "어머님이 지난해 11월 초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어머님 옷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에요."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노친은 감격하시는 표정이었고, 수중에 돈이 없어 허전한 판에 잘 되었다면 싱글벙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내게 5만원을 주시고, 대학생 손녀와 손자에게도 5만원을 주셨습니다.

 

  나는 넉살좋게 돈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려 8개월 만에 병원에서 퇴원하신 노인네가 퇴원 다음날 아들과 손자 손녀에게 용돈을 주는 경우는 이 세상에서 우리 집밖에 없을규." 저녁때 퇴근해서 이런 얘기를 들은 마누라가 노친께 항의를 했습니다. "어머님, 저한테도 용돈을 주셔야죠." "줘야지, 그런데 며느리헌티두 5만원을 주면 나헌티는 3만원뿐이 안 남는디." "그럼, 저한테는 5천원만 주세요."그리고 마누라는 노친에게서 1만원을  받아 5천원을 거슬러 드렸습니다. 그런 '흥정과 거래'가운데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