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2010년 4월 11일(다해)

모든 2 2021. 8. 22. 11:09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성 토마스의 불신앙」, Caravaggio

 

+ 요한 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시는 분  -진윤기 T. 아퀴나스 천안성정동 보좌

 

  초등부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친구들, 친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

  "예수님? 부활? 그게 뭐예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잖아, 어떻게 생각해?"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아니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또 살아나셨대요?"

  "음.. 그게 말이지..."

 

  오늘 복음을 보면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보는 행위를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면서도 오롯이 주님께 의지함으로써 받게 되는 선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로 '부활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 믿는 것이고,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덧밭을 가꾸는 일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일.. 밭주인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씨앗이 싹트고 자라며,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을 키우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께서 도와 주시고 키워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기 위해,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믿음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실천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믿음의 씨앗을 키워주십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않고도 부활을 믿는 사람,그분의 말씀을 진실되이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이미 보지 않고도 믿음을 받아들인 분들입니다. 우리 역시 보지 않고도 믿음을 받아들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가서 어린이들에게 말해야겠습니다. '얘들아,밥 많이 먹고, 씩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너희와 너희의 믿음을 키워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란다."

 

 

<바오로의 먹거리>

 

거꾸로 알고 있는 먹거리 상식(1) - 서관석 바오로. 농학박사

 

  오래 살고 싶은 희망,좀 더 정확히 표현하다면 그냥 아무렇게 오래만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먹거리들에 대한 뉴스를 듣고 있자면 걱정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직접 재배해서 먹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임에도 틀림없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정확하게 알고 먹는 것이 차 선택이 아닐까? 필자는 40년 동안 농업과학연구자로 재직하면서 우리 소비자들이 편향되고 잘못된 상식 때문에 지나치게 걱정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이에 몇 가지  농업관련 상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생명의 신비와 농업의 발달사

  최근 과학의 발달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 곳곳의 농작물에 대한 수확량을 미리 예측하기도 하고, 도심 한가운데에 커다란 식물공장을 만들어 먹거리를 생산하며 어릴 때부터 농작물에 음악을 들려주어 과거보다 병충해에 강하며 수량이 많은 농산물을 생산함으로써 우리들에게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30년 만에 농업과학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농업과학을 맹신하도록 하고 있지만 농업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놀라운 것은 생명의 신비이다. 아주 작은 공간에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도 가지가 서로 엉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바로 "알레로 파시"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식물도 동물과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앞뜰에 수세미를 심어놓고 열매가 맺힐 즈음 한 두번 손으로 만져보자. 어떻게 될까? 그 수세미는 제대로 여물지 않는다. 같은 원리이다. 식물들도 감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도 그 감성이 전해지지는 않을까? 배고픔을 잊지 위해서가 아닌 '좋은'먹거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하는 이유다.

 

  2. 비료와 농약에 대한 정확한 상식

  주부들은 장을 볼 때 두 가지 욕심을 갖고 있다. 먼저 보기 좋고 탐스러운 상품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농약과 비료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은 안전한 식품을 찾는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언뜻 생각해보면 퇴비를 많이 한 지력이 좋은 토양에서 비료나 농약 없이 자란 농산물이면 될 것 같다. 유기농을 강조한 TV광고를 보면 왠지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퇴비는 많이 할수록  좋고 비료는 주지 않는 것이 좋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지력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퇴비를 뿌려주고 부족한 성분은 반드시 비료로 보충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퇴비가 귀하여 산과 들에서 나뭇가지와 풀을 베어 논과 밭에 뿌려주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넘쳐나는 가축 분뇨로 지력이 상한 곳도 있다. 과일도 야채의 맛도 비료를 주어야만 좋아지기 때문에 적정한 수준의 비료는 사용하는 것이 좋다.

 

 농약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처럼 농약에 대한 두려움이 큰 나라도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60-70년대에는 인체에 직접 피해를 주는 농약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의 농약은 생산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농약품질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며, 농약을 뿌려도 대부분 2-3일이 지나면 거의 분해되어 날아가기 때문이다. 이제는 농약을 사용한 농산물을 먹게 될까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농약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편이 더욱 합리적이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다. - 안현심 데레사 . 삼성동 성당

 

 

  특정한 종교를 가지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을 믿으며 팍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저의 생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늦게 시작한 학문의 길에서였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들은 편견없는 자아실현의 장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분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경외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문학 중에서도 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정신의 원형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유한한 육신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소망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 준비 없이 혼자서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성당에서는예비신자들의 교리가 석 달째 진행되고 있었고, 저는 다음에 진행되는 교리를 거듭 받아가면서 열 달만에 영세를 받았습니다. 2010년 3월 16일은 저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되었습니다. 영세식에서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영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세식의 강론 주제는 '세상의 빛이 되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자루의 양초입니다. 개인의 노력에 따라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가 하면, 어느 양초는 아주 꺼져버렸든지, 아니면 꺼져가기도 할 것입니다. 자신의 양초를 살리는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아 실천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말씀이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저의 몫이었습니다.

 

  제가 성당을 찾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길이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느님은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오랫동안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집 나간 둘째아들을 눈 짓무르게 기다리신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저를 기다려주신 하느님,고맙습니다. 자신을 성찰해가는 삶의 길에서 미약하나마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우리가 우리를 믿는 만큼...

 

그만큼

받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분한 마음으로 성호를

 

  충남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태안군 태안읍 도내리 사이 길처에는 긴 저수지가 하나 있지요.  그 저수지를 끼고 아스라이 뻗은 곧은길 옆으로는 전신주들이 가물가물 이어져 있어 자못 그림 같은 느낌을 주지요. 도내리 쪽 저수지 끝 큰길 너머에는 바다를 막은 제방이 있고 제방 아래 갯벌과 또 소리소문 없이 들고나는 바닷물은 평화로움 제체랍니다. 작은 조각배들과 동그란 섬들이 있고 가끔은 큰고니 가족도 볼 수 있는 그곳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해서 종종 그곳에 가서 오후 걷기 운동을 하곤 하지요.

 

  한번은 제방 한 쪽에 차를 놓고 걷기 운동을 시작할 때 일부러 소풍을 온 건지 잠시 쉬어 가는 건지 모를 단란한 한 가족을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부주와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일 것 같은 4인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방 턱 위에 과자 봉지들과 음료수와 캔 맥주를 놓고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 젊은 친구가 날 닮아서 딸 다음에 아들을 두었군,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좋은 때다. 저렇게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살 때가 제일 행복하지 뭐" 나는 혼자 속말을 굴리며 그 가족 옆을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아이들 뺨이라도 어루마져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경치를 감상하며 캔 맥주를 즐기는 그들 부부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묵주기도에 열중하며 얼마간 걷던 나는 일순 '혹시?'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몸을 돌리고 저만치 멀어진 그들 가족을 보니 제방 턱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혹시?' 하는 생각에 그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중간쯤 갔을 때 그들 가족은 승용차에 올라 출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과자봉지며 음료수병이며 맥주깡통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허탈하면서도 분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 젊은 부부를 붙잡지 못한 것이,그들 승용차에 그 쓰레기들을 실어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나는 분한 마음을 안은 채 멀어지는 승용차의 얄미운 꽁무니를 보며 묵주 쥔 손으로 성호를 그었습니다. 분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기는 처음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기도의 지향은 매우 명료한 듯싶더군요.

 

-지요하(소설가. 태안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