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0년 주보

설(연중 제6주일) 2010년 2월 14일(다해)

모든 2 2021. 8. 20. 21:52

「축복하시는 삼위일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

 

 

+ 루카복음 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말씀의 향기>

 

설에 대하여 - 전원석 베드로 논산 부창동 보좌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입니다. 매년 설날이 되면 교통이 혼잡함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형제들을 찾아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모입니다. 오랜만에 식구들과 이런저런 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면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고향의 정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새해 설 이른 아침에 '차례'(茶禮)를 지내왔습니다. 설 차례는 조상들에게 한 해 동안의 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설 차례 모습은 약속의 땅을 찾아가며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만을 섬기고 따라온 백성들이 어떠한 축복을 받게 되는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차례를 지낸 뒤, 우리는 새 옷을 입고 살아계신 어른들께 '세배'(歲拜)을 드려 공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세배'는 민속명절 설날에 웃어른에게 절하며 새해인사를 드리고 덕담(덕담)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에서는 내일 일을 알지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스승들께 예를 올리고 그분들의 말씀을 청해 듣는 것이 오늘 2 독서의 말씀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들에게 공경과 겸손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일깨워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항상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는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오늘 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의 축복을 기억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으로, 자식은 자식으로, 며느리는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성가정을 향한 단순한 진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명절은 단순히 노는 날이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반성하는 날이며,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삶의 깨달음으로써 기쁨을 나누는 날입니다.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면서 항상 새롭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처럼 우리들도 소중한 미풍양속을 잘 기억하면서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올바로 찾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2010년 사순 시기 담화 요약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로마 3,21-22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솔직히 되돌아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올해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 시작하여 '정의'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정의'의 의미와 '불의'의 원인

  '정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마땅히 각자에게 주어야 할 것을 준다."는 의미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물질 재화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현실은 물론 '분배 정의'를 훼손하는 것이지만, '분배 정의'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참 하느님을 저버리면 인간의 정의도 무의미합니다. '불의'의 근원은 외부에만 있지 않고 악에 은밀히 동조하려는 씨앗이 자리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상 자유로운 나눔에 열려 있지만 다른 이들보다 위에 서고 그들에게 맞서도록 몰아치는 이상한 힘, 즉 원죄의 결과인 이기주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혜의 중심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정의는 깊이 연결되어 있기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베풂은 다른 아닌 바로 당신 백성의 비참을 가엾이 여기신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집회 4,4-5,8-9 참조)와 이방인(탈출 22,20 참조)과 종(신명 15,12-18 참조)을 향한 정의를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정의를 이루려면, 불의의 근원이 되는 내면 깊이 닫힌 상태인, 혼자여도 충분하다는 환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 3,21-25)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와는 근본적으로 매우 다르며, 십자가의 정의는 인간이 혼자여도 충분한 존재가 아니라 더 충만해지려면 다른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께 돌아서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혼자여도 충분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 곧 다른 이들과 하느님과 그분의 요서와 친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자연스럽고 좋은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내 것'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나에게 '그분의 것'을 거저 주시는 다른 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겸손이  요구됩니다. 이는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집니다. 전혀 기대할 수도 없었던 그 이상의 것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덕분에 '가장 위대한' 정의인 사랑의 정의에(로마 13,6-10 참조)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서 힘을 얻어 모든 이가 인간 존엄에 따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고 사랑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올해에도 우리는 사순 시기의 정점인 파스카 성삼일에 사랑과 은총과 구원이 충만한 하느님의 정의를 경축할 것입니다. 이 참회의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회개하고 모든 정의를 완성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도로서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자'

 

바티칸에서, 2009년 10월 3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함께 만드는 이야기 마당>

 

그분과의 만남 -이경자 베로니카. 전의 성당

 

  말하기를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면 모태 신앙이라 한다.

  난 개신교 신자인 부모님이 계셨기에 어린 시절 교회 마당에서 또래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보통 한 집에 자식들이 다섯은 넘었다. 그러다보니 교회 마당은 시골 아이들 노는 소리로 넘쳐났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전도사님은 "너희들 예수님께 인사드렸니?" 하셨다. 그러시고는 집안에서는 부모님이 어른이시기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하듯 교회에 오면 제일 어른이신 예수님께 인사드리고 놀아라 이르셨다. 성인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어린 시절 전도사님의 말씀이 생각나 교회 앞을 지나칠 때면 예수님을 만나 뵈러 교회에 들르곤 하였다.

 

  결혼하여 10여 년 쯤 되어 지금의 성당에서 교리와 세례를 받았다. 지금도 가슴 설레는 것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예수님이 감실에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어느 곳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지만 미사 중에 성체로 오신 그분을 만나 뵐 수 있으니 믿음 또한 더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미사 드리려고 가는 것 말고도 이런저런 일로 자주 성당에 가게 되는데 문을 여고 들어서면 불 밝혀 놓은 감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그럴때면 그 분이 '베로니카 왔구나!'하고 반겨 주시는 것 같아 참 좋다.

 

  사랑하는 이와 단둘이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가끔은 일을 우선으로 하여 '주님 저 바쁩니다.'하고 눈으로만 인사 드리고 있지만 다행인 것은 지금도 예수님께 먼저 인사 드린다는 것이다. 이제 새해에는 단순한 인사가 아닌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져 만남의 참 기쁨을 살아야겠다.

 

 

 

오랜 세월 후에도

선뜻 펴 볼 수 있도록

그 무엇을 기록할 수 있는

오늘과 내일이었으면

합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