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연중 제11주일 2013년 6월 16일(다해)

모든 2 2021. 7. 8. 17:32

「회개의 눈물」 황영준 신부(2012,이스라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 루카복음 7,36-8,3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말씀의 향기>

 

불편한 열정  "주님,저희의 열정을 지켜주소서." - 이재홍 프란치스코 온양모종동 주임

 

  연중 시기 전체를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답은 '열정'이라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연중 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즉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병자들을 치유하시며,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고,적대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기이다. 이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뿌리엔 분명히 그분의 '열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정의에 대한 갈망으로 말미암아 당신 주위에 존재하는 약하고 불쌍한 이들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 뜨거운 마음,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정인 것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무작정 영단어를 외우는 것이 영어 공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때,영어 단어 'passion' 이 우리말로 열정을 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영어 사전의 첫 번째 뜻만을 외우면 되던 시절이서, 'passion=열정'이라고만 외워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사전을 찾아보다가 그 단어의 마지막 뜻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수난,교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쓰인 'passion'이 바로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나는 왜 열정이라고 알고 있는 단어가 예수님의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바로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그 답이라는 것이었다.공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든 삶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열정으로 인한 예수님 삶의 결론은 처절한 고통,곧 십자가였다. 정의와 사랑에 바탕을 둔 뜨거운 열정은 그 자체로 매우 존경스럽고, 거룩한 것이지만,그것은 언제나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죄 많은 한 여인이 회개와 용서를 체험하는 자리에서 주변인들이 불편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결국 불편함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리와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은 결구 십자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한다. 과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우리들은 끝이 뻔히 보이는 이 열정의 삶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는 것인다 아니 어쩌면 그 열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연중 시기,매 주일 복음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열정이 불편해지고 있는 우리는 아닌지 되물어보게 된다.

 

 

청소년 바로보기(29)

 

어린이들에게 해 주어야 할 영성 교육

 

  만약 누군가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매사에 정직하고,모든 일에 떳떳하고,이웃과 자연을 사랑하고 배려하며,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기쁘게 살아간다'라고 할때,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저는 가톨릭 교회가 우리 신앙인들에게 신앙 안에서 살아갈 때, 이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아으이 기초를 튼튼하게 만들어 줄 때,이 모든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겠죠. 그러면 신앙의 기초는 언제,어디서,어떻게 만들어 주어야 할까죠? 당연히 신앙의 기초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마음 안에 담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끔 대한민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 그 선택은 자신이 이 다음에 커서 스스로 선택을 하게 해 주어야지요. 라고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그건 가톨릭 신앙이 무엇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가톨릭 신앙이 무엇인지 자신이 아미 알고 있고,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한다면,자녀들에게 어렸을 때의 기초 신앙 교육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훌륭한 인격적 자산을 만들어 주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관정에서 기초 신앙 교육의 시점은 아기가 엄마의 이야기를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자리가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당연히 장소는 가정에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요? 물론 부모의 모범은 기본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모범은 사회의 도덕 교육에서의 모범보다 더 예민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의 모범은 내적인 모범이 더 중요한 것이니까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이로서의 진정성 자체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배경 안에서 해야 할 기초 신앙 교육의 첫 번째 부분은 영성 교육입니다. 참 어려운 아야기입니다. 영성교육!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영성가들의 그 깊고도 깊은 영적인 체험들을 나도 이해를 못하는데 어떻게 그걸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영성가들이 그 깊고도 깊은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때가 되었을 때에 직접 들려주실 이야기이고요.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그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배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분히 따르며 살았던 수많은 성경 속의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나 교회의 역사 안에 나타나는 프란치스코 성인,데레사 성녀 같은 수많은 성인들의 일화들을 가능하면 많이 들려주고, 어린이들의 꿈 속에서 그 수많은 성인들이 등장하여 친구가 되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어린이들의 기초 신앙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문 제3양식

 

  제3양식은 다른 감사기도문과는 달리 특정 자료가 없는 기도문입니다. 제1양식은 로마전문을,제 2양식은 히뽈리또의 기도문을, 그리고 제4양식은  아티오키아 전승에 따른 기도문을 자료로 하여 감사기도문을 작성하였지만,3양시은 특정 전승을 가진 자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전문인 제1양식의 구조를 반영하여 개정,보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전승에 의지하지 않은 대신,여러 전례 전승 자료를 참고하여 제사와 봉헌,찬미와 감사 등 감사기도의 기본요소를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감사드리며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제사를 봉헌하는 의미를 단순하게 전달하기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사목적인 지향으로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는 주일,대축일 미사에서 바치곤 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22) -김두한 . 신부 대전가톨릭 대학교 교수

 

제2편-제2부-제2장-제4절 : 고해성사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새 생명이 약해지거나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고쳐주고 회복시켜주길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치유의 성사,곧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용서하시는 예수님'과 '참회하는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場)입니다. 그래서 화해의 성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해성사 보기를 어렵고 부담스러운 의무처럼 대합니다. 그리고 왜 궃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느냐며 고해성사가 큰 장벽이 되어 점점 교회와 멀어지기도 합니다. 누구든 고해성사 보기가 편한 사람은 없겠지만,고해성사의 참 의미를 깨달아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크게 두 가지 핵심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회개하는 사람의 일,곧 통회,고백,보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중개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즉 교회는 사제를 통해서 성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 주고, 보속의 방법을 정하고, 참회자와 함께 기도합니다.

 

  먼저,통회(참회)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마음으로 아파하고 뉘우치는 것입낟. 고해성사에 꼭 피료합닏.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통회를 보시고 그 대가로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 전에 '이미'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우리는 그 손길을 느끼고 주님께 대한 신뢰로서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 부분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인 사제엑 죄를 고백하는 듯 보이지만,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릿도의 대리자'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고해상사를 거행합니다.(요한 20,23 참조).고해성사 안에서 사제의 역할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결해 주는 중재가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믿음과 참미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조건없이 용서하셨지만,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마태 18,33 참조) 우리는 죄를 용서 받았지만 죄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에 새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제가 주는 보속의 의미입니다. 고해 성사는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라고 사죄경을 외웁니다. 그리고 참회자는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온전히 회복하게 되고,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이웃)와의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양심의 영적 위안을 주는 은총의 큰 선물입니다.

 

 

오늘 아침

고단한 삶을

통회하오니

너그러이 받아주소서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