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제 상처를 장대 삼아 높이뛰기를 희망한다

모든 2 2021. 5. 12. 19:46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마지막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한 마디는 ‘나’라고 했다.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고 했으니, ‘나’라는 우주 안에도 또 다른 우주가 있겠지, 생각한다. 그 우주를 쉽게 손을 뻗어 닿을 수 없는, 아무리 연모해도 충분히 만날 수 없는 ‘그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그 분을 만나지 못했다 여기더라도 이미 그분 안에 내가 안겨 있다면, 내 사랑의 크기와 상관없이 더 큰 사랑 안에 잠겨 있다면, 이를 깨닫는 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행복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연구자였다가 한때 노동운동가였다가, 잡지 편집자였다가 한때 농부였고, 예술심리치료사였고, 나중엔 신문 편집을 맡기도 했다. 결국 지난 25년 동안 변변한 직장도 없이, 유랑민처럼 의식의 흐름에 따라 떠돌아다닌 셈이다. 한 우물을 파야 제대로 된 샘을 얻는다는 상식을 마다했지만, 그래도 되돌아보면, 그분을 만나기 위한 여정에서 몇몇 정거장을 거친 셈이라고 스스로 다독거리고 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 속에서 무엇을 갈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최근 김지하에게 절망한 것은 그가 스스로 ‘시’를 버렸기 때문이다. 시(詩)는 말씀의 집인데, 복음서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하니 사람이 말씀이며, 사람이 사는 세상이 말씀의 집인 ‘시’를 머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전에 나는 김지하에게서 ‘시와 혁명의 통일’이라는 귀한 언어를 얻었다. 마음밭을 가는 것과 세상을 위한 실천적 투신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글을 쓰면서, 농사를 짓고, 사람을 만나고, 취재 현장에 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마저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시는 늘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김승희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에서 “누군가 나에게 넥타이를 입힌다. 그리고 질질 끌고 간다”고 한탄했다. 세상이 가르쳐 준 상식과 도리와 경쟁과 허위의식을 뛰어넘어 그녀는 제 상처를 장대 삼아 높이뛰기를 희망한다. <솟구쳐오르기 1>에서 그녀는 “절벽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하늘 높이 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하고 바란다. “눈썹이 푸른 하늘에 닿을 때까지, 푸른 하늘에 속눈썹이 젖 을 때까지.”

내 나이 오십줄에 들어서 맘먹고 시작한 언론활동도 그 안간힘의 한 끝이겠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지금 일하고 있는 <가톨릭일꾼>도 마찬가지다.) 모든 육신을 입은 이들이 ‘걸어서 하늘까지’ 가야 하듯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함께 찾아보자는 시도다. 옷자락이나마 그분을 매만지고, 그분처럼 호흡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제 공간적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십년 만에 다시 이식된 삶이지만, 까를로 까렛도 수사의 말처럼 ‘도시 속의 광야’를 찾아 보는 작업도 의미 있을 것이다. 모두가 도시를 떠날 수 없다면, 도시에서 시골을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여기서 명상과 수행에 성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