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가난한 인생을 향한 열정의 우울함

모든 2 2021. 4. 3. 18:57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43

사진=앙리 가르띠에 브레송

우연히 인터넷을 드나들다가 발견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는데, 샤르트르, 까뮈 자코메티 등 작가 예술가들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사진은 까뮈와 수전 손택의 사진이었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까뮈는 담배를 입에 물고, 손택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앉아 있었다. 금연을 고민하는 내게 그들의 멋진 제스처가 눈에 들어와 심기가 좀 불편하지만, 하여튼 참 멋진 모습이고, 그 몸에 밴 깊이가 헤아려진다.

그렇게 알게 된 수전 손택은 <우울한 열정>이란 책을 썼다. 우울한 열정이라니! 이 책은 폴 굿맨, 롤랑 바르트, 앙토냉 아르토, 엘리아스 카네티, 레니 리펜슈탈, 발터 벤야민,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었다. 솔직히 좀 어려워서 건성건성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편인데, 줄곧 나는 책 제목이기도 한 ‘우울한-열정’의 실체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책은 ‘우울함과 광기 그리고 천재성 사이를 배회하는 전위적 지식인들’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수전 손택은 줄곧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내면을 향한 열정과 어지럼증 나는 예술’을 열렬히 찬미하고 있다. 손택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항상 ‘주류 예술 밖에 존재하는 광기어린 예술’과 ‘때때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인류의 경험이 닿지 않는 철저한 변방의 예술’이었다. 냉정하고 합리적이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손택은 이 예술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고통’에 충분히 길들여진 채 그처럼 고통스럽게 전위적인 언어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책과 사람을 소개하려다 보니, 자꾸 어려운 말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염려스럽다. 그러나 중요한 말은 손택이 ‘주류 세계의 상식’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모두가 이리로 갈 때 그녀의 시선은 전혀 엉뚱한 곳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지배력을 확장하려고 신경 쓰는 동안에 그녀는 무력함과 가난과 비참의 현장으로 눈길을 모으고 행동한다.

사진=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어느 책에선가 미국 가톨릭일꾼운동을 창립했던 도로시 데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녀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1993년 사라예보 내전에 관하여 전 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했으며, 2003년에는 9・11 미국 무역센터빌딩 폭파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태도와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런 점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찍었던 브레송이 손택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참 적절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주류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탐욕과 한사코 주류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먼저 달려가는 겸손함이 함께 공존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묻고, 아마도 엘리야 예언자처럼 “오늘, 선택하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구간에서 성령의 힘을 입어 처녀인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 났다고 믿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새벽을 기다리던 목자들에게 찬양을 받은 이 아기가 바로 메시아, 곧 왕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예수가 탄생하자,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고 주님의 천사들이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한다.

한편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예수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특별한 잉태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의 어머니 아티아는 아폴론 신전에서 깊은 잠에 빠져, 뱀의 모습을 한 신에 의해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옥타비우스는 태양이 아내의 자궁에서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예수처럼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신인 아버지와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잉태된 것이다. 그리고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모든 아시아 신전에는 이러한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비로써 우리와 우리 뒤에 오게 될 사람들에게 전쟁을 끝내고 모든 것을 평화로운 질서 속에 놓이게 할 구세주를 허락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의 출생일은 그분 때문에 세계를 위한 좋은 소식(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와 아우구스투스는 출생의 시기와 과정이 엇비슷하며, 평화의 왕으로서 복음을 만방에 전해 줄 신의 아들, 메시아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추앙한 사람들은 제가끔 전혀 다른 부류였다. 로마와 그 식민지의 모든 권세 있다는 자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따랐겠지만, 식민지 통치 아래서 고난 받던 백성들은 예수를 선택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예수의 부모는 가난한 노동자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승승장구하여 로마를 삼켜 황제가 되었으나, 예수는 뼈저린 적빈(赤貧)의 처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결국 세력가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극형을 당해 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로 세상을 평정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세상에 분란을 일으키고 사람들 마음속에 하느님의 자비를 심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했던 자가 한편에 있었으며, 한줌 옷마저 빼앗긴 자가 다른 한편에 있었다.

사진=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그 출생의 비밀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고, 황제를 구세주로 숭배 했던 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하느님이 계시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아우구스투스 안에서인가, 아니면 예수 안에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명확한 입장과 분명한 자매형제들을 발견할 것이다. 누가 우리의 친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답변에 따라서 우리의 시선도 그들이 사랑했던 것들을 따라가 머물 것이다. 군기(軍旗)와 곡물 창고를 훑어볼 수도 있겠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고통 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후배를 통해 얻은 녹음 테이프가 하나 있다. 2007년 10월 21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령쇄신봉사회에서 주관한 서울 대회에서 박홍 신부와 차동엽 신부가 강의했던 내용이었다. 이 강의는 참으로 듣기 민망하였다. 박홍 신부는 이런 말을 한다. 주전자에 물을 담으면 물주전자가 되고, 술을 담으면 술 주전자가 되고 똥을 담으면 똥 주전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전자라면, 여기에 성령을 듬뿍 담아 성령 주전자가 되자는 것이다. 그 성령이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우리 안에 가득가득 담아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자고 선동하였다. 수시로 때때로 말끝마다 ‘아멘!’이 터져 나왔다. 느낌대로라면, 자칫 “성령 얼마치 주세요!”하고 거래라도 할 판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 그저 성령을 받아야 살 길이 열린다는 게 강의의 요지다. 즉 “여러분! 성령 많이 받아 가세요!”하고 말하는 것이다. 스티 커나 극장 티켓처럼.

차동엽 신부의 강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령을 받은 삶이란 무지개 원리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소원 성취하듯이, 무지개 원리대로 살면 ‘만사 오케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성령이 무지개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고 믿는 것일까 <무지개 원리>라는 책과 다르게, 역시 성령 세미나라서 그런지, 무지개 원리 강론 중에 이런저런 성경 내용을 자주 인용하였다. 신자들은 아마도 무지개 원리가 하느님 말씀이라도 되는 듯이 알아들을 것이다. 물론 중간에 여전히 ‘아멘!’이 터져 나왔다. “지금, 성령으로 복 받아라!” 하는데 ‘아멘’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믿음으로 확신을 갖고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해 뭔가를 몰두하다 보면 아마 길이 열릴 테지. 다만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게 흠이다. 그게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면 그 길 끝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있어야 한다. 예수는 세상에서, 상식의 차원에서는 실패한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박홍 신부나 차동엽 신부나 예수를 실패한 인생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으니까. 실패인 듯하지만 성공한 인생이 예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이 있기 전에 벌어진 현실 속에서 겪을 수많은 고난과 실패를 감당할 용의가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고난과 고통이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 치르는 삯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결과였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성공으로 가는 데 항상 걸림돌이며, 예수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예수를 빌려 말하지만 예수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난한 인생을 향한 열정의 우울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