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새벽에 그를 만나, 혁명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모든 2 2021. 3. 23. 18:55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42

이런 새벽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죽어 넘어지더라도 세상은 여지없이 예전처럼 회전하겠지. 어린 자녀들의 아직 잠들어 있는 뽀송한 얼굴을 바라보곤 이른 새벽 어느 가장은 연장가방을 메고 첫 버스를 탈 것이며, 아직 동트기 한참 전부터 거리를 쓸고 있는 미화원들의 하얀 입김이 새벽공기를 데울 것이며, 또록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은 영어 단어를 읊조리며 학교로 갈 것이다.

어느 집에선 압력밥솥에서 잘그락잘그락 김이 오르고, 새떼들은 일제히 담장으로 날아들 것이다. 새벽 5시 청진동 해장국 골목에선 새벽 첫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려는 밤샘 취객들이 서성거릴 것이다. 태안반도의 그 어부는 아침마다 기름으로 얼룩진 바다에 나가서 밤새 혹시나 말간 얼굴로 바다가 되돌아왔는지 부질없이 확인하고 한숨을 내쉴 것이다.

그래도 날은 밝을 것이다. 그래도 아침은 기대를 낳을 것이다. 오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와 같을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아도 밤새 내가 변하였으므로 세상은 다른 빛으로 눈부시게 다가올 것이다. 거칠어진 손을 마주 비비고 새로운 하루 시작하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그런 말 했다지. 평화시장 봉제공장 어린 시다들에게 “나인 너여!”라고 했다지. 그래서 이 몸 죽어도 나인 너 안에 내가 살아 있지, 생각했다지.

네 가슴에 그리움처럼 살아 있기 위하여 생생하게 오늘을 살고 기꺼이 내일을 네게 주었다지. 나를 주고 네 안에 영원히 살기 위하여. 아니, 우린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몰라. 한몸이었는지도 몰라.

공사장에서 식판을 들고 밥을 먹는 인부들을 보거나, 탑골공원에서 장기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노인이나 제 몸보다 서너 배나 됨직한 폐지를 손수레에 싣고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가는 노인을 보거나, 혹은 볏짚을 정갈하게 쌓아놓고 담배를 태워 입에 무는 골 깊은 노파를 보거나, 배추를 부리고 이윽고 화물차가 출발하길 기다리는 운전석의 아낙을 보거나, 내 안에 너 있음을 본다. 너를 위해 하루를 시작하는 나를 본다.

박노해는 그런 마음들을 헤아렸던 것일까.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는 시를 읽어 보면, 너를 위한 나의 마음이 읽힌다. 너를 미처 생각하지 않아도 내 모든 일이 너에게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다.

제 몸을 때려 울리는 종은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 귀를 만들지 않는다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온 목수는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지 않는다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들, 한 번은 다 바치고 돌아와
새근새근 숨쉬는 상처를 품고
지금 시린 눈빛으로 앞을 뚫어 보지만
과거를 내세워 오늘을 살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흙과 뿌리를 보살피지만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오늘 젖은 얼굴로 걸어갈 뿐이다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
참 좋은 날이다

조금 힘들어도 많이 행복하고 많이 일하고 싶다, 너를 위하여, 또한 결국 너인 나를 위하여. 그렇게 지상에서 천국을 미리 살아 살맛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지, 생각해 본다.

박노해, 폐허의 레바논에서 (사진출처=나눔문화)


정말 희망이 간절한 시절이다. 모두가 제 발끝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면, 나의 모든 일이 부질없는 외사랑이 아닐까, 맥이 풀린다. 다들 제 잇속만 챙기려 한다는데, 다들 제 가족을 돌보는 데만 마음 쓰는데 나만 혼자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저들은 저들대로 나는 나대로 제 갈 길을 걸어가면 그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 따져 보면 저나 나나 모두가 제 생각에 몰두하며 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제 생각에만 머물지 않는 게 사람이다. 대의명분을 쫓는다 해도 그 속에서 제 이익을 탐하고 있는 게 사람이고, 개인의 삶에 주목하는 이들도 그 안에 선한 의지가 사방에 손을 내밀고 있을 법하다. 사람이란 나와 주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뒤엉켜 사는 모양이다. 그러니 단정짓지 말고 그냥 그저 사랑하자, 말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살아낼 필요가 있다. 언젠가 어디쯤에선가 너를 만나고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 「아직과 이미 사이」, 박노해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그렇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몸 가볍 게 맘 가볍게 그렇게 건너가야 해. 피터 모린은 ‘푸른 혁명’ (Green Revolution)을 제안했었다.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탈자본의 섬을 만들자고 했다. 탐욕으로 움직이는 질서 안에서 사랑으로 움직이 는 공동체를 꿈꾸었다. 낡은 사회의 껍질 안에서 사뭇 다른 희망을 잉태하고, 마침내 껍질을 뚫고 새로운 생명을 낳아 보자고 했다. 누구에게 기댈 것 없이 지금 여기에서 내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으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 손이 있는 자는 손으로, 발이 있는 자는 발로 희망을 지금 여기에서 나누어 보자고 했다.

우리가 혁명가다. 비노바 바베나 체 게바라만 혁명가가 아니다. 존 레넌도 노래하는 혁명가였고, 참살이를 갈망하는 모든 이가 일상 속에서 지금 여기 혁명가로 태어난다. 혁명가(革命家)란 운명을 바꾸는 사람이다. 내 삶의 에너지가 흐르는 길을 돌리는 사람이다. 세상 한가운데서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더 높은 이상을 위해 힘쓰기로 마음을 돌린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은 몸소 혁명가의 모델이 되어 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일상성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며, 그분은 만질 수 있는 몸이 되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자잘한 삶 한 가운데서 아프고 다친 구석을 돌보았다. 동료들과 새로운 우정을 맺고 따뜻한 시선을 나누었다. 자연의 이치에서 배우고 해맑은 이상을 가르쳤다.

이상주의란 항시 위험한 것이지만, 더 낮은 곳에서 더 높은 가치를 살아내는 게 쉽지 않지만, 예수는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디자인 하셨다. 그리고 고통 받았지만 고통에 머물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 안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먼저 나은 세상을 살아 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러 새벽에 길을 떠난다. 만나서 혁명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