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46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 하고 불렀다. 엄마는 없었다. 우리에게 호칭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부친과 모친, 아버지 어머니, 아빠 엄마라는 말이 있지만, 그 각각의 언어가 주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어머니와 달리 엄마란 ‘친밀함’을 드러내는 호칭이다. 나는 성장과정에서 한 번도 그렇게 불러 본 적은 없지만, 요즘은 누구나, 내 딸아이 역시 아버지를 ‘아빠’라 부른다. 그런데 이른바 철이 들면서 아빠는 ‘아버지’로 굳어져 가며, 그 호칭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어릴 적 부르던 ‘엄마’는 우리의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얗게 세더라도 여전히 ‘엄마’이며, 그 역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짐짓 체면상 ‘엄니!’ 또는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더라도 마음으로는 ‘엄마’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아홉 달 동안이나 손수 당신의 자궁 안에 거두어 길렀다. 그 안전하고 느긋한 어둠속에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햇살이 자욱한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도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엄마의 품은 따뜻하고, 내가 당신의 자궁에서 들었던 맥박소리를 여전히 귀 대고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다. 엄마는 내게 모든 세상을 의미했다. 당신의 까만 눈동자에 맺힌 얼굴이 바로 ‘나’임을 발견했다.
그런데 사실 그 엄마가 내겐 없었다. 엄마는 나의 유년기부터 행상을 다니셨고,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뻔히 엄마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으레 ‘엄마!’를 부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소리를 통하여 마음속에서 엄마를 불러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이란 엄마의 흔적을 되짚어내는 데 적절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정작 그 자리에 없어도 ‘집에서’ 엄마를 불러 봄으로써 엄마를 기억해 내고, 우리는 안심한다. 그래야 해질 때까지 밖에 나가서 지칠 때까지 친구들과 놀 수가 있다. 현실이야 어떻든 엄마는 나의 안전판이며 전진기지이며 쉼이기 때문이다.
위니캇이란 심리학자는 유아가 출생 후 3년 동안 어떻게 엄마 품의 경험을 하였는지 주목한다. 아기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 주고 안아 주었을 때 아이는 엄마를 통하여 이 세상은 ‘안전하다’고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래야 아기는 커서도 주저없이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갈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나한테 근본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한번 살아 볼 만한 게 인생이라고 믿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 실패하면 다시 엄마의 자궁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나, 자기 안에 갇혀 버리는 ‘자폐’ 증상을 보이게 되거나, 생존을 위해 억지로 순응하는 아이가 된다. 결국 거짓된 자기를 발전시키게 되면서 ‘자기실현’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기를 가진 엄마는 적어도 초기 3년 동안은 아이에게 몰두할 필요가 있다. 아이에게 육신을 주었으면, 이제 당분간 내적인 힘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이 아무리 건강한 정신을 지녀도 현실(환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음을 살면서 새기고 겪으면서 확인하는 까닭이다. 다만 내적 힘이 갖추어진 아이는 현실이 좀더 견딜 만할 것이며,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잃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끝없이 신뢰를 보내는 ‘영원한 엄마’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등을 돌리더라도 끝내 돌아가 안식 할 젖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게 나를 지지해 주는 분, 그래도 나를 믿어 주고, 내 처지가 곤혹스러울수록 더 아껴 주는 분, 그분의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영원한 엄마’가 온전한 형상을 지닐 때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런 뜻에서 엄마는 곧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엄마를 통해 미리 경험한다.
치마부에와 조토의 성모 마리아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아빠(abba)’라 불렀다. 근엄한 아버지,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져 앉은 분이 아니라 친밀함 가운데 이야기를 나눌 만한 분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 아빠는 ‘엄마의 남성형’ 정도로 생각해도 좋겠다. 시시비비를 가리시는 아버지도 필요하지만, 무조건 자비를 베푸시는 아빠와 엄마가 다스리는 자비로운 품이 예수에겐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젊어서는 정의를 주장해야 마땅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관대한 사랑을 더 찾게 된다. 세상 일이 뜻대로 맘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세상엔 기뻐할 일보다 슬퍼할 일이 더 많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 이러한 심리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도 ‘훈육’의 가치보다는 ‘보살핌’의 가치가 더 중요함이 당연할 것이다. 이쯤에서 ‘어버이’라는 말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일까, 싶다.
이쯤 되면, 교회 안에서 왜 유난히 성모 신심이 발달해 왔는지 깨닫게 된다. 공식 교리와 신학에서는 모든 게 ‘예수 중심’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분이 예수의 모친이기 때문이지, 마리아를 그 자체로 공경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사코 사람들은 성모님을 즐겨 찾는다. 이 전통은 교회 역사 초기부터 내려온 것인데, 교회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로 가부장적인 법제도로 정착되면서 더욱 완강한 믿음살이로 자리 잡아 왔다.
여러 차례의 종교회의를 통해 갈릴래아의 바람 속을 헤치고 다니시던 예수의 모습보다는 그분의 정체에 대한 관심이 깊어갔다. 삼위일체 신학뿐만 아니라 온갖 형이상학적 신학 논쟁이 무성해지고, 하느님과 예수는 그저 성부와 성자로서, 가부장권의 원천처럼 이데올로기화 되었다. 결국 하느님의 모습 가운데, 예수가 그렇게 다정히 부르던 ‘아빠’라는 발음은 사라졌다. 하느님은 엄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훈육하고 죄를 묻는 관리자로, 군주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하느님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사라지자, 가난한 군중과 무력한 신자 들은 다만 성모님에게 의지할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냥 부족한 자녀라도 품어 안아 주실 것 같은 엄마이신 마리아에게 하소연하고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보기에 하느님의 자비는 성모님 안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엄마 없이 하루인들 편히 살 수 없다. 영원한 어머니를 하느님에게서 찾을 수 없다면 성모님 안에서 창조해야 한다. 이제 와서 우리는 역으로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의 ‘엄마 됨’과 예수의 다정함을 발견한다. 성모님은 영원한 엄마의 반사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가 인류에게 선물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영원한 엄마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엄마이신 마리아여,
비천한 이를 가엾다 들어 올리시고
가난한 이를 당신의 단 젖으로 배불리 먹이소서.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하느님의 자비를 저희에게 보여주소서. 아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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