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부활 제3주일(생명주일)2014년 5월 4일 (가해)

모든 2 2021. 5. 6. 15:40

동행」김택민 신부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0-31)

 

+ 루카 복음 24,13-35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하고 물으시자,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 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말씀의 향기>

 

기억  "기억하여 행하여라" -김동겸 베드로 신리성지 주임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르지만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억들 중에는 쉽게 잊혀지는 기억이 있고,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있으며,정작 중요한 것은 잊어버린 채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그런 기억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기억이었을까요?

 

  두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그분과 함께했던 과거의 기억은 하나도 없고,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연관된 며칠이 전부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생활하면서 체험했던 기억들,그분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하셨던 모든 말씀과 기적들에 대한 기억들,이런 기얼들은 그들에게 전혀 남아있지 않고 오로지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기억만이 그들에게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과 빵을 떼어 주시며 깨우쳐 주시자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게 되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참으로 깨닫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매 관계마다 예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있어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시라도 방심했다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쉽게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를 늘 우리가 가까이 한다면,분명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주님을 잊지 말고 참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부활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73)>

 

'청소년이해'를 위한 꼭지(16) 마지막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③(사랑)

 

 오늘은 그 동안 연재해 왔던 '청소년이해'를 위한 시리즈의 마지막으로,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철학의 세번째 요소인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이태리어로 '사랑'은 'Amore' 이다. 그러나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에서 말하는 사랑은 Amore 가 아니라, 'Amorevolezza'이다. 즉 Amore+volezza 인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보다 더 확장적이고 추가적인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돈 보스코가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 개념의 사랑이 아니라,'감응하는 사랑'을 말한다. 청소년들을 말로만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청소년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 하라'는 것이다.

 

  얼마 전 자녀와 문제가 있는 가정을 면담하였다.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매우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늘 해외출장이 잦았고, 그런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늘 명품(?)선물들을 아낌없이 사다 바쳤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심한 갈등관계를 갖게 되었고,어머니의 권고로 가족 모두의 상담이 된 것이다. 이 가정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온갖 선물을 세상 곳곳에서 사다 바쳤지만,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사랑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한다.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농구란다. 아버지가 농구공을 사주고, 농구화 및 명품 운동복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단 5분만이라도 나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농구를 해 주었다면 자기는 소원이 없겠다 한다. 이 가정은 전형적인 사랑의 메시지 전송 실패인 것이다. 자기방식대로 자녀를 사랑하면,자녀들은 사랑밪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다시 말해 돈 보스코의 말씀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를 우리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면담 또는 상담해 달라고 하면 조건을 걸곤 한다. 가족 전체가 면담에 응하지 않으면 안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들만의 면담 및 상담을 부탁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있으며,그 결과가 문제행동 또는 이탈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인데 상처를 준 가해자는 한 명도 없다 모두가 피해자다. 그것은 바로 상대가 나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우리 모두가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고 싶은 자기욕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대전교구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면이 제한적이어서 충분히 표현 및 전달을 못했음을 전해드리며,부활인사를대신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신현문 발렌티노 신부 대전 정림동 살레시오 청소년수련원 원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기념환호(신앙의 신비여!)1

 

  성체에 대한 경배가 끝나면,빵의 형상 안에 계신 주님께 환호를 드리게 됩니다. 지금 이루어진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1"라고 말하면,교우들은 환호로 "주님께서 오실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화답합니다. 과거에는 성체를 흠숭하는 기도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고,여러 가지 다른 기도문으로 화답한 기로기 남아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세 가지 양식으로 우리의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신앙의 신비에 경배의 환호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21)>

 

부러우면 닮는 거다

 

행복은 부족함에 대한 기쁜 발견

 

 

  작은 마을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새로 전학 온 슬기는 오늘도 자신만의 독특한 인사법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슬기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만나는 친구마다 엄청 큰 목소리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는데,목소리보다 더 독특한 건 인사의 내용이었다.

 

  슬기 : 미현아, 안녕!

  미현 : 안녕,슬기야!

  슬기 : 난 네가 웃을 때 참 예쁘서 좋아.

  미현 : 정말?

  슬기 : 내가 웃을 때도 너처럼 예뻤으면 좋겠어!

  미현 : 내가 밉지는 않고?

  슬기 : 미워? 왜?

  미현 : 우리 엄나가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덴데..

  슬기 :부러운게 왜 지는 거야?

 

  "청년의사"라는 의학신문에서 '부닮'이라는 독특한 연재코너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부닮'이라는 단어는 '부러우면 닮는 거다'라는 말의 줄임말이었죠. 주변에서 정말 닮고 싶은 의사분들을 릴레이 형식으로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기사 내용도 좋았지만, 제게는 이 코너의 기획의도가 더 크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부러움이 패자의 증거라는 공시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보다,기쁜 마음으로 부러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를 꿈꿔 봅니다. 부러움으로 씁쓸해지는 낙오자의 느낌보다 부러움 때문에 희망이 생기는 편한하 나그네가 많아지는 사회를 꿈꿔 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삶을 진정으로 부러워할 줄 아는 용기,그리고 그 부러움으로 그분의 삶의 한 자락이라도 오롯이 닮아 보려는 겸손함이 절실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우리의 뜯기고

찢어진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하나

채워주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