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곳」가톨릭사진가회
"마귀의 유혹이 끊이지 않으십니까? 홀로 외딴곳을 찾으십시오"
+ 마르코 복음 1,29-3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것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레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말씀의 향기>
기도는 선교의 원천입니다 "기도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 -김춘오 힐라리오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인간의 고통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고통없이 살 수 없습니다. 육체의 고통 앞에 선 인간은 "나는 고통스러워 밤이 새도록 뒤척거리기만 합니다."라는 욥의 기도처럼 무기력하고, 더 나아가 정신적인 허탈과 상실감이 빠져 어떤 대상에 도움을 청하거나 혹 왜 이런 시련이 있는지 자문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신앙인마저도 병환 앞에서 하느님이 없는 것같이 느껴지고 깊은 신앙과 희망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과 함께 계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해 주십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예수님의 손을 건네는 행위는 인격적(Persona)이고 구체적인 만남으로 무력감과 상실감을 치유해 주시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병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고통에서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고통과 시련은 위기이며 동시에 은총의 기회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 받는 동안 신앙이 흔들린다면 위기이고, 반대로 주님의 현현을 희망한다면 평화의 시간이 될 것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위로와 자비의 하느님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란 절망 안에 희망이 있고, 죽음 안에 생명이 있고, 의심 안에 신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에 숨겨진 비밀은 희망과 생명입니다.
복음의 둘째 주제는 선교입니다. 복음 선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입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홀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그런 다음 두루 다니시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요 일과는 '기도하고 기쁜소식을 전하는 삶'(Oraet labora)이었습니다. 선교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가!"(로마 10,15)라는 말씀으로 선교 행위를 극찬했습니다. 예수님도 바오로도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웃에게 전파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에게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에게 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기븐 소식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면 예수님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일을 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기도합시다. 지금 기도하면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행복합니다. 기도하면 사랑합니다. 기도는 평화이고 사랑입니다. 또한 기쁜 소식의 원천인 기도는 선교입니다.
<시니어 칼럼(1)>
부양의식의 변화
우리 사회는 지난 30년간 급속한 경제성장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는데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가족이 아닐까 합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대가족이 대부분이었고 그 때의 어르신들은 가족의 중심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책임지셨습니다. 농사짓는 일이나 대소사 챙기는 일, 심지어는 손주들이 아플 때 민간처방까지 해 주시곤 하셨는데요, 살아오신 경험들과 지혜로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시던 분들로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셨습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기술과 능력이 대우받는 산업사회에 들어오면서 어르신들의 권위나 지위는 하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이 되었고 가정에서 조차도 핵가족이 증가하다 보니 핵가족의 중심은 부부이지 조부모들이 아닌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논밭을 팔아 자녀들 교육에 헌신한 덕분에 자녀들은 교육 수준이 부모보다 높아졌고, 서양교육을 받은 자녀들의 가치관은 노부모를 부양하는 의식마저도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4세 이상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부모를 장남이 부양하는 게 좋다고 응답한 경우는 해마다 줄어드는 대신에 이들과 딸 양쪽 모두가 부양의 책임이 있거나, 자녀 중 형편이 가장 나은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게 좋다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45세 이상 중년의 성인자녀들에게 설문한 결과에서는 결혼한 자녀들이 부노 가까이에 살아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사고에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요. 어르신들의 생각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양의 노부모들조차도 자녀와는 급하면 뛰어갈 거리에서 서로가 가까이에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런 걸 두고 '스프가 식지 않는 거리'라고 하지요. 이 거리는 걸어서 30분 이내에, 혹은 부모자녀가 1.5km 이내에 함께 살면서 서로가 자주 들여다보기 위해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노부모들은 성인자녀와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생활만족의 수준이 달라질 만큼 노부모에게 아들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까이에 두고 살면서 의지할 때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계십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자신감을 잃게 되니 자녀에게 의지하며 사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어르신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책임지려는 생활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자신을 위해 헌신하신 노부모와 가까이에 살면서 진심어린 관심과 배려를 보인다면 내 자녀들도 나의 행동을 보고 배워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내가 부모에게 했던 것처럼 내 자녀들도 나를 돌볼 것이니 결국은 나를 위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임송은 헬레나. 대전보건대학 노인보건복지과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미사 때 제대 위에 촛불은 왜 켜놓은 건가요?
제대 위에 켜진 촛불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밝히는 우리 신앙인들의 사명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전 봉헌 예식 중 촛불을 밝히는 예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교회 안에 환히 비치어 모든 백성이 진리를 충분히 깨닫게 하소서." 이러한 이유로 전례를 경건하게 거행하고, 미사의 성대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제대 위에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전례의 등급에 따라 대축일에는 제대 양쪽에 촛불을 세 개씩, 주일과 축일에는 두 개씩, 기념일과 평일에는 하나씩 밝힙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5) 김정환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장
떼어놓을 수 없는 신앙의 벗들 : 방 프란치스코, 박취 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정산 필(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 면천 출생,1799년 홍주에서 장사 |
박취득(라우렌시오) | 면천 출생,1799년 홍주에서 교수(약 30세) |
원시보(야고보) | 홍주 출생,1799년 청주에서 장사(69세) |
정산필(베드로) | 덕산 출생,1799년 덕산에서 장사(약 50세) |
위의 네 분은 죽음도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는 신앙의 벗들이다. 네 분의 고향이 각각 면천, 홍주, 덕산으로 나타나지만 실재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이분들이 사시던 내포지방의 삽교천 인근은 경계가 뒤엉켜 있는 특수한 지역이어서 실제로는 멀지 않은 거리이나 행정구역은 달라 교우들이 체포될 때에는 각자의 관할 관청으로 끌려갔다.
네 분은 서로 나이 차이가 많았으나 신앙을 가진 후에는 절친한 벗처럼 지내며, 넷 중에 누군가 체포되면 서로를 천주교 신자라고 고발하여 함께 순교의 길로 가자고 결심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약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모두 차례차례 체포되어 관할 관청이 있는 홍주, 청주, 덕산으로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끌려갔다. 이분들은 다른 곳에서 옥살이를 하며 서로 만나지 못했으나 한결같이 신앙을 지키며 함께 약속한 길을 걸어갔다. 이들 역시 일반적인 사형절차가 아닌 매를 때려 죽이는 형벌(장사(杖死)에 처해지거나 옥중에서 교살되었지만 누구도 그들은 약속을 무너뜨리지는 못하였다.
체포되기 전 이들의 신앙생활은 매우 실천적이어서 성경의 사도행전에 니와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조선의 풍습에 맞게 적용하였다. 재산이 많았던 원시보(야고보)의 경우 주일과 축일마다 음식을 많이 준비하여 모든 사람이 오도록 초대하였다. 그리고는 "오늘은 구세주의 날이니 기뻐하며 이를 축하해야 하고, 동시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나문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드려야 합니다."라며 사람들을 권면하였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생겨난 변화중의 하나는 '신앙을 매개로 한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이다 길고 긴 그 이전의 역사 안에서 이와 비슷한 공동체가 있었을 것이나 천주교 신앙공동체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초창기 교우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신분과 나이, 가진 자와 없는 자, 혈연과 지연을 뛰어넘는 삶을 살려고 애들 썼다. 그분들에게는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거든 가진 것을 다 파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빈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지표였다. 성경에나 나오는 꿈같은 이야기가 250여 년 전 이 땅에서도 시작되었고 지금도 우리들은 그렇게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
날마다 보람되게 하소서.
낮은 것으로부터의 행복과
높은 곳에서의 사랑으로
날마다 고운 마음
보람되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만족한 어부 <앤소니 드 멜로 신부>
북방에서 온 부자 사업가는 남방의 어부가 자기 배 곁에 드러누워 빈둥비둥 담뱃대나 빨고 있음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고기잡일 안 가시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지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잡으면 되잖소?"
"그래서 뭘하게요?"
"그래서 돈을 더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당신 배에 알맞은 발동기를 살 수 있고, 그러면 더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러면 또 돈을 더 장마하여 나일론 그물을 갖출 수 있고, 그러면 또 더욱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만큼 돈을 많이 벌게 되지요. 얼마 안 가서 어선 두 척을 살수도 있겠고.. 그러다가 어쩌면 거대한 어로 함대까지 거느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처럼 부자가 되는 거요."
"그러고는 또 뭘하죠?"
"그러고는 편안히 앉아 쉬며 삶을 즐길 수 있지요."
"당신은 지금 내가 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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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 줄 아는 능력을 고이 간직함이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더 슬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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