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1년 주보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2021년1월24일(나해)

모든 2 2021. 1. 26. 17:42

 

황무실 성지

충남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

 

 

+  마르코 복음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의 시간   -김현태 안토니오 대사동 보좌

 

  평화를 빕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고, 어느 정도 밤이 깊어지면 잠자리에 듭니다. 일상 시간을 설명해 보라는 요청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비슷하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 1초가 60개 모여 1분이 되고 1분이 60개 모인 것을 시간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시간은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에서도 시간에 대한 부분이 자주 언급됩니다. '때가 차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한 처음에'등등 여러 가지 표현법으로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 말씀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는 사뭇 다른 성경의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확실한 목적과 의미, 곧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 속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완성하시길 바라셨고, 하느님의 활동과 함께 모든 시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완성을 향해 인도되어 갑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다르게 느껴지는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결국 우리들의 시간 또한 하느님의 시간 안에 속해 있는 것이고, 만일 하느님의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시간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지극히 일상적인 시간의 연속, 앞서 언급한 바처럼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들조차 하느님 안에 속한 것임을, 그분께서 함께하시는 시간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사건을 마주한 순간, 한편으로는 인간인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고, 도무지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없어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작용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시간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며 그분을 따라나선 제자들과 같이 하느님의 시간에 우리의 시간이 속해 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시간을 언제든, 어디서나,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기쁘게 하느님의 시간에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4-5)

 

  이제 때가 찼고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부르십니다. 우리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의 귀는 어떤 것을 들어야 하는지,우리의 손과 발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잘 알지만 쉬이 잊어 왔던 바를 되새기며 그분의 때, 그분의 부르심에 우리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드립시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94. 생태환경 보호를 위해서 종교가 앞장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행성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실이 자연보호, 가난한 이들의 보호, 존중과 형제애의 관계망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를 서로 나누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201항)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릴 사명, 곧 가꾸고 돌볼 책임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창세 1장 참조)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 등 생태환경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자연을 오로지 조종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격하시키거나 그것을 무제한 사용하고 인간의 의지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려 할 때, 인간은 자연을 억압하며 결국 자신의 환경을 파괴합니다. 이를 거슬러 생명 존중과 평화라는 공동 관심사를 기반으로 모든 종교가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를 믿든지 모든 이는 각자의 삶에서 생태환경 보호를 위하여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도록 요청 받고 있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눈에 보일 때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나라 의료기술도 참으로 많이 발전한 듯, 가끔 좋은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임신 25주에 출산한 380g 초극소 미숙아가 건강하게 자란다거나 최단 임신기간 출산 기록인 22주 530g의 아기도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퇴원했다는 소식이다.

 

  현실에서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 22주에 조산한 아기가 장애인이 될 우려가 있거나 키우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부모와 의사가 합의해서 조산아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형법의 살인죄(과실치사가 아님)로 구속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22주의 아기를 유도분만으로 낙태한 의사나 부모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아무 일도 없다. 적발된 적도 없으니, 처벌된 적도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죽이면 안 되고, 죽여도 되는 기준이 무엇인가?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다. 눈에 보이면 못 죽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개인의 안위와 편의를 위해서 죽이기도 한다.

 

  "태아에게 장애가 예상되어 낙태하고 싶어요.'라고 낙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기 본인이나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낙태를 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장애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장애인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일까? 똑같은 논리라면 사회의 불행 요소인 장애인을 제거해야 마땅한가?

 

 당연히 눈에 보이는 장애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인은 제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것이 쉽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만 것이다.

 

  장애는 분명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불편이 곧 불행은 아니거늘, 늘 주변의 모든 불편 요소를 제거하면 세상은 행복해질까? 고통이나 불편은 인간 존재의 삶의 한 부분으로 항상 있다. 고통이 있기에 고통이 사라진 기쁨도 아는 것이고, 불편이 있기에 사랑과 희생이 필요하다.

 

  만일 '상대적 불편 요소'를 제거하는 식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우생학적 인종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로, 열등하고 불편한 요소를 지닌 인간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후대를 위해 지금의 열등한 나의 존재마저 부정할 수 있는가.

 

 상황에 따라, 눈에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판단을 달리하는 잣대가 여전히 마음속에 있다. 2020년 전 세계 사망 원인 1위는 눈에 보이는 180만여 명의 사망자를 낸 코로나 19만이 아닌, 4200만 건의 눈에 보이지 않는 태아들의 낙태였다는 사실도 이제는 알아야 하겠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도박중독과 회복>

 

단도박 모임(G.A.)과 상담 과정

 

  G.A. 는 외부에 도움을 받지 않는 익명의 도박자들 자조 모임으로 한국에서는 단도박모임이라고 칭합니다. 도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가 가능합니다. G.A.는 A.A. 의 영적인 원칙(12단계 회복프로그램, 12단계 일치 프로그램)들을 지침으로 채택하여 1957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도박중독으로 고통을 받아온 한 신부가 미국 G.A. 에 참여해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1984년 6월 13일 첫 모임을 시작하여 현재는 전국 52여 개의 모임이 있습니다.

  전국 G.A. 모임은 주로 성당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충청권에는 6개 <천안가톨릭하품센터, 서산 운산동 성당, 아산 용화동 성당, 도박문제관리센터(대전, 청주), 천안보건소>의 모임이 있습니다. G.A. 와는 별개로 도박으로 상처받은 가족들을 치유하기 위한 가족 자조 모임(Gam-Anon)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G.A. 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모임에 가면 다른 도박을 배우거나, 다른 도박자들을 만나 더 안 좋은 길로 빠지면 어쩌나 걱정하지만 그런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모임을 통해 자신과 동일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회복하는지 보고 듣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도박문제관리센터는 전국16 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1년 내내 무료 상담으로 진행 합니다. 그 외의 지역은 도박문제관리센터와 업무협약 (MOU)을 맺은 상담 센터에서 도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1년에 12회기, 가족은 4회기 무료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 상담만으로 도박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상담을 마친 사람이나 처음부터 상담이 잘 맞지 않는 사람 모두 G.A.로 연계를 합니다.


  G.A. 모임 참여와 상담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오픈하고, 자신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보고, 애니어그램, MBTI 등으로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며, 반복적인 성찰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치유자’ 역할을 합니다.

 

  도박중독은 금전 부분과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재정 상담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현재 채무 상태 분석부터, 빚 갚는 과정과 대출 방지 부분에 대해서도 상담이 가능합니다.


•G.A.(Gambles Anonymous, 단도박 모임), A.A.(AlcoholAnonymous, 단주모임)
•12단계 회복 프로그램과 12단계 일치 프로그램 내용은 단도박모임 홈페이지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http://
www.dandobak.or.kr)

 

-김형석(프란치스코) 도박중독치료 사례관리자-

 

도박문제해결 : 단도박 모임(02-521-2141), 도박문제관리센터 헬프라인(1336)

 

 

 

 

내 마음

가난할수록

주를 따르겠습니다.

 

소심한 내 영혼

맑디맑게

주님께 흐르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