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2020년 12월 27일(나해)

모든 2 2020. 12. 25. 19:15

해미 무명순교자 성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http://www.haemi.or.kr

 

 

  +  루카 복음 2,22-40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레를 거행할 날이 되자,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로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이제야 말씀하신 대로,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당신 백성 이스라엘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말씀의 향기>

 

우리가 머무르는 그곳은 어떤 자리인가요?   -신성수 베드로 세종프란치스코 제1보좌

 

 

  특수청소 전문가라는 직종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을 청소해 주는 것이 아니라,안타까운 죽음으로 남겨진 빈집을 청소해 주는 직업인데요. 대부분 극단적인 선택,기이한 생활 습관으로,아무도 손대기 꺼려하는 그 뒤처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누군가가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마리아,요셉 성가정의 모범을 나누는 날 뜬금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그만큼 우리가 자주 접하는 집,가정의 모습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2020년 6월 말,행정안전부 발표에 따르면 1,2인 가구가 38.5%,23.1%로, 2015년 이후로 1인 가구가 우리 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가구 형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 만나면 사람들이 대화는 기승전-부동산이라고 하는데요, 그렇게 모습이 바뀌고 끝없이 오르는 집값에만 관심을 가지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나자렛 성가정 이야기가 얼마나 울림으로 다가갈까요?

 

  얼마 전 기쁨을 나누었던 성탄절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머무실 최고의 거처를 가장 허름한 곳으로 정하셨습니다. 절대 사람이 사는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집(?)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이 온통 비정상적으로 오른 그 집에 마음이 빼앗겨 버렸는데 말이죠. 혹은 내 집에 머물렀던 외롭고 힘들었던 사람의 흔적을 손대기 싫어서 돈 주고 사람 부르는 오늘날,우리는 과연 어떤 집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나는 어떤 집에 머물기를 바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특별한 가정이 나옵니다. 빠듯해보이는 살림살이에도 율법에 따라 비둘기를 봉허하는 그런 가정입니다. 장차 아이에게 닥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어머니가 계시고,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아내와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그 아버지는 그런 가족을 남겨 놓고 먼저 떠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가정은 안절부절하거나 각박하게 지내지 않고, 소박하지만 서로 사랑을 나누며 지냈다고 합니다.

 

 가정이 위기라고 걱정하는 오늘날,성급하게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것을 먼저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어느 정도의 갖춤'이 아니라 '소박한 가난과 사람'이 그 밑바탕이라는 겁니다. 그런 가난한 마음,감사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절대로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2020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로 머무르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정성껏 청소하는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그곳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이 무엇이고,필요 없는 것,갖다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손수 정리하고 돌아보는 연말이 되셨으면 합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태중의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예수님은 언제 이 땅에 오셨을까? 우리는 쉽게 성탄대축일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로부터 9개월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성모영보,수태고지라는 이름으로,아기 예수님은 작은 태아의 모습으로 성모님의 자궁 속에 오셨다. 대부분은 자신의 생일만 기억하지만,9-10개월 전에 자신이 엄마의 자궁에서 수정되었던 순간,부모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세상에 온 날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도 기나긴 9개월의 세월을 성모님의 태중에서 보내신 이유가 있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은 역시 너무나 작아 보이지 않던 수정된 태아로서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셔야 했다. 그리하여 인간 생명이 그 시작인 수정된 순간부터 얼마나 고귀하고 존엄한지 아기 예수님이 몸소 드러내셨다.

 

  우리 구세주의 탄생은,마리아와 동참하지 않은,정혼한 요셉이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원치않는 임신이라는 이유로, 당시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낙태할 수 있었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그 임심을 지속했기에 이루어졌다. 만약에 예수님이 낙태되셨다면? 그 아찔한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구세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시기도 하지만,구세주 스스로 가장 연약한 자,가장 작은 자로 오셨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가장 연약한 태아에서부터 우리에게 오신다. 태중에서부터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 주셨다. 그래서 엘리사벳의 태중의 요한과 성모님의 태중의 예수님이 서로 만난 기쁨이 어떤 것인지 복음은 전해 주었다.(루카 1,39-45)

 

  더욱이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최후의 심판,마태 25장)에 따르면 모든 태아는 바로 예수님처럼 소중히 여겨져야 하며,태아에게 준 고통은 바로 예수님께 행한 것이다.

 

  이제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도 성모님이 태중에서 심장박동을 통해 그 작은 손과 발의 움직임으로 당신이 존재하심을 드러내셨고,태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셨다.

 

  어느 누구도 바로 생김과 동시에 태어나지 않았고,어느 누구도 태아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참 사람으로 태어나신 우리 구세주도 마찬가지셨다. 태중에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님이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때로는 무심코 벅차며

힘들고

때로는 행복하고 기쁘며

늘 곁에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항상 마음이 쓰이는

'가족'

 

그래서 가족은

사랑입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