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대림 제4주일 2020년 12월 20일(나해)

모든 2 2020. 12. 25. 12:03

 

합덕성당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루카복음 1,26-38

 

<보라,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리아야.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자,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분,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말씀의 향기>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준석 사도요한 괴정동 보좌

 

 

   대림초의 모든 촛불이 채워진 대림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빛이 충만하게 밝혀질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성모님께 전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전한 것입니다. 다윗 집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으로 완성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이 구원약속을 다윗 왕조에만 한정하여 민족의 부흥으로만 연결시켰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다윗 왕조만 챙긴다면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크게 기쁜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세주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약속한 구세주는 다윗 왕국을 구원하는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분,바로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 앞에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인간의 권력과 풍요의 회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을까 등등의 복잡한 생각들이 성모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이 대답에 모든 것이 정리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받아들이기 어려워도,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니 하느님의 구원계획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을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확답입니다.

 

그래서 성모님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꺼이 응답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하느님의 일은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데 굳이 동참할 이유가 있는가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자유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분명 이루어지겠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동참하는 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더라도 성모님처럼 기꺼이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자유의지를 봉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인간의 자유의지,그 신앙의 응답으로 완성되는 합작품입니다. 다윗 왕조의 부흥만을 바라고 희망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행복을 좇는 인간의 의지가 충돌했지만,우리는 성모님처럼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느님의 선하신 뜻대로 내 자유의지를 봉헌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92. 사형제도 폐지를 위하여 여러종교가 한목소리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복음에 비추어 '사형은 개인의 불가침과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2267항)

 

  공권력은 인권과 사회 규범을 손상시키는 범죄 행위를 억제하고자 범죄자에 대하여 형벌을 부과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형 제도는 일부 중대 범죄에 대한 적합한 대응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형 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형제도가 범죄예방 효과가 있는지 의문시되며,사법제도의 오판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 전체가 그의 범죄행위만을 기준으로 판단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사형 의외의 형벌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시민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범죄자의 속죄와 교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형제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종교는 일찍이 사형 제도를 폐지하려고 노력해 왔고, 2000년 이후에는 범종교적 차원에서 기도모임,연극제,포럼,음악회,미술전,정부와 대화등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사형 집행을 중지하고 있기에,2007년 이후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의 대열에 있습니다. 사형 제도에 대한 국민 정서의 변화에 도움이 되도록 가톨릭 신자들과 이웃 종교인들은 적극적 연대와 협력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나의 빚쟁이 친구,그게 누구?

 

 

  나에게는 수현이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어렵게 취업해 회사에 다니게 되었는데,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다. 월급은 200만 원인데 한달에 쓰는 돈은 350만원이라고 한다. 좀 아껴 쓰라고 충고도 해 보지만,이래저래 나가는 돈이 많다며 새겨 듣지 않는다. 이 친구는 늘 나에게 돈을 빌린다. 한두 번은 흔쾌히 빌려주었지만,점점 나도 부담스러워졌다. 사람들에게 수현이처럼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다들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현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얼마나? 그게 나이고,그게 우리 모두이다.

 

  타일러,「두 번째 지구는 없다」'나의 빚쟁이 친구'

 

  국제생태발자국네트워크가 측정한 자료에 따르면,요즘처럼 생태자원을 소비한다면 우리나라 기준으로 지구가 3~4개 필요하다고 합니다.(더욱이 이 통계는 2017년자료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준을 넘어섰다는 것은 미래에 쓸 자원을 미리 당겨 쓴다는 건데요. 그러니 수현이가 1.75배 빚을 졌다면,오늘날 우리는 3~4배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심각성,위기를 느끼지 못할까요?

 

 문제는 눈으로 보이는 가격의 함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용어를 잘 살펴봐야 하는데,바로 '가성비'와 '외부 효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성비'라는 용어가 소비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는데 텀블러나 컵을 사용하는 수고로움보다는 일회용품을 택하는 것,오래된 물건을 고치는 것보다 최저가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대형마트나 소셜커머스에서는 이 '가성비'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우리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지금도 잘 통합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울러 우리가 지금 지불하는 가격에는 '외부 효가'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표적인 가격이 전기세입니다. 사실 전기요금이 정확한 표현이지만'세'라는 표현이 익숙한 이유는 그 가격에 다양한 세금이 붙기 때문입니다. 주택,교육,산업 등등의 영역에 따라 다양한 세금이 부과되며,심지어 주택용에는 누진요금이 추가로 부과되기 때문에 그 인식이 여전합니다.

 

  이 전기요금에는 생태-환경과 관련된 외부 효과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도군에는 화력,원자력 발전소가 없는 대신,외딴 해안가에 이런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오염,처리와 관련된 비용은 전혀 이 가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응당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인데,과연 이 비용이나 책임은 누가 더 부담할까요? 아니 그 피해는 누가 더 많이 입을까요?

  다시금 코로나19가 늘어나면서 3차 패데믹이 진행 중에 있고 다들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우려해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이 엄청난 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낭비'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면..제발 부동산,주식같은 탐욕 가득한 경제공부 말고 지구의 절박한(?) 경제공부를 해야 할 때입니다.

 

  -신성수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새벽 강가에 나갔더니

주름 주름인 강물 위로

지나는 바람 있어

찬 호흡으로

내 영혼 맑게 씻어

너울너울 보냅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