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 복음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보라,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인간이 존엄한 이유 -김용태 마태오 교구 정의평화위원장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인 '인권'은 이 마땅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한가? 모든 피조물 중에 지능적으로 가장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라서? 그것이 존엄함의 이유일까? 원숭이보다 낫다는 사실이 인간 존엄성의 이유인가?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엇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 이뤄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만일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언가보다 더 낫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교와 차별은 각자의 존엄함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자리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함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보다 못한 것과의 격차를 통한 존엄함이 아니라 세상 가장 존귀하신 분과 가깝다는 사실에서 오는 존엄함이다. 존엄함이란 것이 그런 거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어도 인간은 얼마든지 존엄할 수 있다. 재산,학력,지위,출신,성별 등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그런 것이라면 인간성이 회복되고 인권이 존중되는 삶이란 결국 우리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모습 안에서 지존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력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노력을 '사랑'이라 부르신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이며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신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마태 25,31-46 참조).
보다 크고,높고,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격차와 차별이 자신의 존엄함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작고,낮고,약한 것들은 무시당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세상이야말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마르 1,4)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정녕 모든 사람을 존엄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1,1)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치움으로써 '참사랑이신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마르 1,3 참조)참된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90. 개신교와 성공회,정교회 등 갈라진 그리스도교 교단도 이웃종교입니까?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아버지께서 제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안에 있듯이,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17,21)
비록 개신교,성공회,정교회,천주교 등 이름과 조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에 속합니다.
각 교회의 지체가 되는 이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며,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형제자매입니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린 이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앙 실천에 대한 갈등 때문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갔으며, 이후 자체 안에서 많은 새로운 교파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그리스도교'의 한문 표기인'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을 선호합니다.
'천지 만물의 주관을 모시는 종교'라는 뜻을 지닌 천주교(天主敎)는 동양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는 선교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로 불리는데 '가톨릭'은 '보편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갈라진교회'나 '보편교회'라는 표현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갈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인 개신교 신자들보다 불교 신자들을 월등히 선호하고,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올바른 이해와 정서적 포용력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소비자 임금님
"이 세상의 왕이 누구일까요?"라고 아이들에게 물으니 "하느님이오!"라고 답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돈을 가지고 있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사고 있는 소비자가 왕 노릇을 하고 있다.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을 지닌 소비자는 왕과 같은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 '소비자들'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답하다 보니 본래 왕이신 하느님께서 지으신 질서를 거스르고 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이 본래 왕께서 지어 놓으신 순서이고 그 절기에 걸맞는 먹거리를 먹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왕이신 소비자들'께서는 사시사철 푸른 채조와 열대과일을 맛보시기를 원하고 계시며 실제로 그 원은 손쉽게 채워지고 있다.
한겨울에 푸른 채소를 소비자 왕들께 맛보여 드리기 위해서는 이중삼중의 비닐하우스 안에 기름을 태워 난로를 피워야 한다. 이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며 그 와중에 온실가스가 뿜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열대과일 역시 머언 남쪽 나라로부터 배에 실려 오느라 기름을 태워 지구를 뜨겁게 만드는 데 기여를 하고 있다. 채소와 열대 과일뿐이겠는가? 소비자 임금님들의 식탁에 빠지지 않는 소,닭,돼지를 먹이는 사료는 대부분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온 곡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농'나눔터에 나누어 주는 가톨릭 농민들의 먹거리는 제철을 어기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지어 놓으신 '창조 질서'안에서,허락하시는 만큼만 생산하여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하여 지구에게도 결국 사람에게도 이로운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니,우리 사회와 교회가 유기 농사를 짓는 농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강승수 요셉 신부 대전가톨릭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온 누리에
촛불 밝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자연을 존중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수중함을 아는
참 아름다운
우리 되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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