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2020.10.18(가해)

모든 2 2020. 10. 18. 22:07

 

여사울 성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 마태오 복음 28,16-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향기>

 

  파견되어 선포하는 사람   -이재선 세례자요한 도마동 보좌

 

   전교 주일입니다. 선교라고도 하고,복음화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수행하라고 말씀하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교회의 이 선교사명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선교의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하느님을 받들어 부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누군가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들으려면 누군가 하느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누군가 하느님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파견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파견된 누군가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이 선교 과정에 있어서 파견되어 선포하는 사람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복음이라도 선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100원짜리 볼펜이라도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나눠줘서 받아온 볼펜과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건네준 볼펜은,같은 100원짜리 볼펜이지만 나에게 있어 각각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복음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아직 들어본 적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의 가치를 선포하는 사람을 통해 가늠해 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도 예비자분들 중 많은 분들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보여준 삶의 모습을 통해,그 사람의 신앙과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직접 말로써 신앙을 권유하거나 복음을 선포하지 않더라도,세상 속에서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선포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근래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신앙인들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에 뿌듯하면서도,한편으로는 신앙에 소홀해지는 모습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좋은 모습이든 그렇지 못한 모습이든,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모습 그 자체가 각자의 복음선포이며,교회의 선교사명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84.  종교간 대화에는 누가 참여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소명 때문에 그가 다수 상황에 놓여 있든 소수 상황에 놓여 있든 그의 일상생활에서 대화를 하도록 불리었다."(「대화와 선교」30항)

 

  종교 간 대화의 네 가지 유형 가운데 일상에서의 '삶의 대화'와 공동선을 위한 '활동의 대화'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적인 대화'와 종교 체험을 나누는 '영성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학문적인 대화 안에서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나누고자 하는 이는 자기 종교의 가르침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이웃 종교의 신조를 이해하고 그 언어와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종교와 이웃종교에 대한 깊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초월적인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심리적 영성적 평화와 안정만을 추구하는 영적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성 때문에 영성적인 대화에는 판단력과 영적 식별력을 갖춘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각자의 신앙에 따라 공동선과 세계를 위하여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책임!!!

 

 

 

  널찍하고 큰 방에서 지냅니다. 방 3개,거실 1개,공부할 수 있는 방 1개,주방 1개 그리고 화장실 3개,이 넓은 곳에서 혼자 지냅니다. 부자처럼 삽니다. 그런데 제 것이 아닙니다. 제 것이 아니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어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사제관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거처로 지냅니다.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내는 것이 덕이 되는 공간입니다. 버리거나 나누기도 어려운 공간,공적으로 사들인 것을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보이지 않은 것처럼 지내게 됩니다.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편한 만큼 에너지를 소비하는 구조 속에서 지냅니다. 에너지가 있어야 작동하는 기구들이 대부분인 공간,리드선으로 연결된 전열 콘센트 30개를 거뜬히 채우고 다른 리드선을 찾습니다. 참 편안하게 삽니다. 그리고 복음적이지 않게 지냅니다.

 

  서구인들은 1인당 30명 이상의 석유 하인들을 부리면서 산다고 합니다. 화석연료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구조가 공고하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20명 이상의 석유 하인을 부리며 지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입고 자고 먹고 타고 싸고 가꾸고 심지어 공부하는 것까지..,모든 과정이 화석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태양의 작용과 지구의 순환 과정 속에서 화석연료가 된 것은 살아있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석연료는 이전에 존재했던 생명의 살과 피일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생명을 통해서 지속하는 순환입니다.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의 죽임을 통해서 이어집니다. 그래서 산다는 행위는 죽임에 대한 책임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책임질 수 없다면 기존의 살았던 방법을 멈춰라!"

 

  누군가는 말합니다. 천천히 가자고,그런데 천천히 가도 되는 걸까? 기후학자들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마주 않는다는 것

서로 말하며

주고받는 것

 

믿음으로

마주앉아 나누는 것

 

사랑,화해,평화

내 마음부터

해야 하는 것.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