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르바란「성 그레고리오」1626~27,198×125cm,세비아,벨라 아르테스 미술관
+ 요한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마라 -백종관 요셉 병원사목 전담-
그 언젠가 선배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 사십은 처음이지?" 예,맞습니다. 사십은 처음이었습니다. 사제생활 10년이고, 인생 절반 정도 살았으면 그에 걸맞게 뭔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지만 오늘의 제자들처럼 매 순간 삶의 한가운데서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저것 갖추면 그 두려움이 사라질까? 인생을 많이 경험하면 그 두려움이 사라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능력을 갖추면 그 두려움이 사라질까'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삶에는 부활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병원사목을 하면서 환자들과 함께 면서 어렴풋이 바라봤던 기쁨의 순간은 바로 '용서의 순간'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조차 자신의 생명마저 다 내려놓고 웃으며 평온하게 누워 있던 환자들의 공통적인 모습 중 하나는 용서였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병마와 싸우면서도 자신을 그토록 더 괴롭히던 다른 한 가지는 용서받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떠나보낸 부모,남편,아내,자식과 미처 나누지 못했던 한마디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던 김광석의 노래 가사처럼 지금 이 순간과 이별하며 사는 내가 두려움없이 평화롭게 살기 위한 것은 용서밖에 없었습니다. 내 스스로가 그 누군가를 용서하기에는 부족했는지 주님은 그렇게 다시 한번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기회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상하게도 이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아픔이 끝내 죄스러움으로 남았는지 주님께서 다시 나와 함께해 주신다는 말씀이 용서의 말씀으로 들릴수밖에 없는 지금입니다.
매 순간을 맞이하며 살아가기에 나와 함께 있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의 억지로 찾아 헤매어 얻어진 것들이 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이 지금 이 순간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멋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받아 주던 아버지의 모습도, 토마스에게 다시 한번 당신의 상처를 드러내신 예수님의 모습도,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공동소유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지금 이 순간 서로 함께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마라, 그러니 평화가 너와 함께'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선을 넘는 녀석들
어릴 적 기억를 떠올려 보면 이런 가게가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닭이 진열되어 있고 거기서 고른닭을 그 자리에서 잡아서 손질해 주던 가게인데오. 죽은 닭이 탈수기(?)같은 곳에 들어갔다 나오면 하얗게 맨살을 더러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솔직히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그날 저녁 닭볶음탕에 정신이 팔려 미안함도 잠시뿐이었습니다. 30년도 더 지난 기억이지만 그렇게 내가 먹은 '고기'가 불과 얼마 전까지는 살아서 움직였던 생물이라는 것이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게 쉽게 접하는 '고기는 사연이 좀 다릅니다.동네 마트에 가면 아주 깔끔하게,그리고 부위별로 진열되어 만날 수 있습니다. 어제 인상깊게 봤던 먹방의 레시피(?)를 따라,어느 부위의 고기를 어떻게 조리해야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도전할 수 있고요. 이마저도 귀찮다면 휴대폰으로 통화하지도 않고 육해공 종목별로 '수준급의'고기'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일상이 되어 그런지 몰라도 이제는 이걸 연결시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 '고기'가 제품이나 상품이기 이전에 살아 움직였던 생물이었다는 건데요. 예전에 비해 엄청 편리해지고 위생적이로 나아졌지만,이제는 그 가축들이 어떻게 자라 우리집 식탁에 오르는지,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필요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무관심을 틈타,이제는 그 변종 바이러스들이 우리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전 국립기상과학원 원장이었던 조천호 박사님의 강의에 따르면 육상 척추동물의 총 몸무게 중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정도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죠?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이 잡아먹기 위해서 키우는 가축이67%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척추동물이 97%라는 겁니다. 과연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육식의 보편화,대량 살처분,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마무리는 강병철 의사선생님의 인터뷰로 합니다. 이 사태의 연결고리는 무엇이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짜 일상은 무엇인지를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어땠나요? 풍요로운 삶에 중독되어 물을 오염시키고,온실가스를 뿜어내고,쓰레기를 마구 쏟아내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침범했다고 생각하죠. 그 바이러스는 원래 동물의 몸에 있었습니다. 왜 동물의 몸에 있던 바이러스가 넘어왔을까요? 아파트를 짓고, 도로를 깔고,골프장을 세운 숲과 산과 초원은 동물이 먹이를 찾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에요. 동물이 없어지면 그 속에 살던 바이러스는 어디로 가야할까요?<강병철 의사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번역>
-신성수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우리가 아픈들
주님의 고통을 어찌 알겠습니까.
계절은
아픈 역사를 묻은 체
또 와서 이렇게
우리 옆을 서성입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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