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해외 원조 주일)2020년 1월 26일(가해)

모든 2 2020. 1. 26. 21:0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생가,12세기 경,아퀴노

 

 

  마태오 복음 4,12-23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레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바다로 가는 길,요르단 건너편,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갈리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말씀의 향기>


  나와 상관 없었던...     -박제준 신부 세종성요한 주임-


  저는 지난 5년 동안 대전교구 한끼100나눔운동본부에서 일했습니다. 한끼100원나눔운동은 지난 2008년 대전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이하여 대전교구민 전체가 매끼 식사 할 때마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100원씩 나눔을 실천해 온 운동입니다. 한끼100원나눔운동본부는 교우들의 정서을 모아 국제 협력사업,대북지원사업,금융복지운동 등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를 하다가 이곳에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교회와 사회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한끼100원나눔운동본부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복지기관들이 세상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세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여기서 일하면서 만나게 된 새로운 세상입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내가 직접 어려운 이웃을 찾아 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위에 그런 이웃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도움을 순수하게 받아 줄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본다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교회를 통해서 나눔과 자선을 이미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구호단체들이 여러분을 대신해서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는 해외 원조를 위한 국제협력 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교회의 공식기구인 ''한국 카리타스'를 비롯하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바보의 나눔','한국외방전교회',이태석 신부님께서 활동하셨던 '살레시오 수도회'등 많은 단체들이 해외 원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20여 개 단체가 1년에 한 번 가톨릭 해외원조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고, 더 나은 기준과 방법을 모색해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대전교구는 한끼 100원나눔운동본부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2003년부터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정하고 국제 공동체의 협력과 발전을 위한 공동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국제협력사업(해외 원조 사업)은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원조 주일을 지내면서 어쩌면 나와 상관없었던 지구 저편의 사람들이 해외 원조 기구들을 통하여 나와 상관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53. 유교에서도 사후 세계를 믿습니까?


  "형제들이여,여러분 민족들의 과거 역사를 바라볼 때 무엇보다도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여러분의 현인들의 사상과 수많은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는 영적 가치들에 대한 감각입니다. ·····가족에 대한 여러분의 효성과 애착,조상에 대한 여러분의 공경,이 모든 것은 영의 우선성을 보여줍니다."(바오로6세,아시아 정부들과 국민들에게 보내는 라디오담화,1970년 11월 29일)


  죽은 뒤에 사람이 어떤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표현을 유교 문헌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교의 여러 경전에는 조상들이 죽은 다음 승천하여 상제를 모시고 자손들을 굽어보며 보살펴 준다는 구절이 있고,이러한 영혼 불멸 신앙은 조상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공자도 유교 경전의 전통적 영혼관을 이어받아 인간의 삶이 사후에도 어떤 형태로든지 지속된다고 믿었으며 조상제사를 중시하고 이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다만 그는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죽음 이후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는 대신 현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되었을 당시 지배적 이념이던 성리학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기(氣)가 하늘로 올라가는 혼(魂)과 땅으로 내려가는 백(魄)으로 흩어진다고 여기며 영혼 불멸 또는 사후 세계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영혼 불멸 문제를 천주 문제와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위함이며, 영혼 불멸에 대한 신앙이 수덕의 기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테오 리치는 "영혼 불멸에 관해서 고대인들은 아무런 회의도 없이 심지어는 사후 천당에서 아주 오랫동안 산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으나,현재의 지식층들은 사후에 영혼이 소멸한다고 생각하며 내세에 천당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않는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유교 제사의 기본 정신은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보본반시'(報本反始)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근본인 하늘과 땅과 조상의 은혜를 되돌아보고 효(孝)을 다하고자 합니다. 조상 제사를 중시하는 자세는 유교 경전의 영혼 불멸 사후 세계보다는 살아 있을 때의 도리와 공경에 치중합니다. 유교는 조상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현재를 살고 있는 후손의 어진 삶을 강조합니다.



생명의 문화를 이루기 위한 키워드생육성(生育性,generativite)-생명을 전달하는 기쁨


  이번 달부터는 교회가 전하고자 하는 생명의 이야기들 가운데서,곰곰이 묵상해 볼 만한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언젠가 생명운동을 하면서 조금은 식견이 부족했던 저에게 근래 생명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들과 연구들 가운데 신선하게 다가온 한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생육성(生育性,generativite)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라틴어의 생명을 '낳다'라는 generare(제네라레)동사에서 파생된 '생명의 종류'를 뜻하는 '장르'(Genre)라는 말과, '탄생'을 뜻하는 nativite(나티비떼)라는 말이 결합된 말이다. 이는 하나의 과정,곧 사랑과 출산에 이르는 전 과정의 본질적인 여러 활동들이 한데 모인 말이다. 가령 사랑을 시작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자연스레 발생하는 연예와 결혼,육체적인 성관계와 임신,마침내 출산에 이르기까지 포함하는 모든 활동들이 연속적으로 결코 개별적이지 않고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또한 이 개념 안에는 생명을 낳는 행위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생명윤리와 혼인,그리고 가정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생명의 문화를 위한 새로운 키워드로 제시된다.


  특별히 그 의미가 인간의 육체성과 넓은 의미의 여성의 세계 사이의 불가분리적인 관계,곧 태어날 생명에 대한 관심과 수태된 존재(아기)를 돌봄,그리고 그 존재(아기)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그를 옹호하고 보호하며,그의 발전과 성장을 가능케 하는 관심과 돌봄까지 포함하는 삶의 중요한 순간들도 담고 있다.


  여기서 생명출산의 과정은 네 가지 순간을 나뉜다. ① 생명을 갖고자 열망하고,②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며,③ 생명을 돌보고,④ 마지막으로 그 생명이 떠나 가도록 내버려 둔다. 이때 위의 '생육성'이란 말은 원초적이고 본래의 인간 행위를 풀어가는 상징적인 코드이자 키워드가 된다. 나아가 교육의 차원에서도 공동체의 선과 인간의 전인적 발달,그리고 연대적인 참여에 이르는 사회,문화,경제 구조에 이르는 생명의 전(全)영역에서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과정의 각 순간에는 다음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① 열망 안에는 열망보다 더한 무엇이 있고,②  탄생 안에는 탄생보다 더한 무엇이 있으며,③ 돌봄 안에는 돌봄 그 자체보다 더한 무엇이 존재하며,④ 자신을 비우거나 희생하는 행위 안에는 단순한 자기포기나 희생보다 더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①  이 하나의 통합된 전체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② 그 전체의 중심적인 의미는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이다.③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의 성별이나 삶의 처지에 관계없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전인적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데 서로 다르게 생각하며 살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잘 기억하며 '생육성'(generativite)에 관한 이야기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주님!
이 시간부터

내가 아닌 우리로

모두 함께하는

축복을 주시어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