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2019년 11월 24일(다해)

모든 2 2019. 11. 24. 21:30

 

 

 

렘브란트「라자로의 부활」1632,36.6×25.8cm,동판화,런던,브리티시 뮤지엄

 

 

  +  루카 복음 23,35-43


  <주님,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정말 하느님의 메시아,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폐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질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왕과 나   -강대원 즈카르야 천안불당2동 주임-

 

  예수님께서 못박히셨던 십자가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하지만 십자가 위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어떠한 왕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화려한 모습도,위대한 모습도,왕이라 생각되어지는 그 어떠한 모습도,십자가 위에는 우리의 관념 속 왕의 모습은 없다. 그러면 어떠한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 예수님이라고 기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삼중직무 즉, 예언직,사제직,왕직의 직무를 받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직은 교회를 다스리는 사명으로써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와 인간,그리고 세상의 구원에 대한 봉사를 말한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처량하기 그지없고, 군인들은 물론 같이 못박힌 강도에게조차 조롱을 당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모습이 아닌,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신다. 곧 성체와 성혈이라는 음식으로 당신의 지체이며 당신의 벗들인 우리들에게 언제나 생명을 내어주시는 모습을 십자가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왕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로 모든 이를 섬기러 오신 진정한 왕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일치 안에서 오는 선물을 통하여 변화되어 가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처럼 되기 위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예수 그리스도처럼 죽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는 것,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다른 이들 위에 서고자 하는,남들보다 더 잘 살고, 잘 먹고,잘 돋보이는 삶이 아닌,남들 아래에 있고자 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하여 내 생명을 내어주는 성체 성혈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한 모습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고 우리의 지상 여정을 살아 간다면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함박웃음을 지으실 것이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45. 가톨릭 신자로서 불교의 좌선 체험을 해도 됩니까?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그 신앙의 실천에서 '명상의 차원'을 강조합니다.

...명상 생활을 하는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을 가져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교황청 종교간 대화평의화,1998년 부처님 오시날에 불자들에게 보내는 경축 메시지)

 

  불교의 좌선은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하고 자기를 깊이 성찰하며 자아를 버리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고요한 환경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고르며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통일해서 아주 맑아진 심경에 도달하는 경험을 가톨릭 교회의 묵상이나 관상 생활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미 행해지고 있습니다.

  본디 좌선은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계속되는 좌선만으로'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심리적 정신적 활력을 주려는 보조 수단으로,그리고 불교 전통에 감추어진 '말씀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영성교류'차원에서 좌선을 활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 경우에도 현대의 뉴에이지 사상이나 종교 혼합주의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 깊게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묵상과 관상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영성의 확고한 기초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위령 성월을 보내면서 또 다시 묻게 된다. 관연 나는 내년 오늘 다시 아침 해를 볼 수 있을까 내게 생명을 준 이가 언제라도 생명을 회수하면 나는 생명을 내려 놓아야 한 텐데, 그래서 예사사람은 「내년 오늘 어디 있을지를 알라. 明年此日知何處(명년차일지하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간은 올해도 아름답게 물든 가을의 단풍이 말하듯 아름다운 존재이다. 인생이 비록 몇십 년이지만 이 시간은 저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른,때로는 사람을 탄식하게 하거나 기쁘게 하는 이야기들마저 수없이 엮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다면,아무리 인생의 마지막 고갯길에 다다르고 있더라도,'내년 오늘을 장담할 수 없는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한다.

 

  이렇게 "아직도 충분한 시간"이라 여기며 삶을 살고 있다면 그와 더불어 "살아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기쁨이겠는가. 살아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며,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지금 생명,그 자체를 살아가는 것이 저마다 아름답게 볼 수 있겠다.

 

  더욱이 우리는 단순히 뜨스한 가을 햇볕을 쬐는 데서도 행복감을 느끼고, 그 햇살이 내 눈에 들어오는데 8분,북극성의 빛이 200년,안드로메다 성운의 빛이 800년 걸리는 데서 하느님의 영원(永遠)과 무한(無限)에 참여하고 있으니,오늘 나의 생명은 더없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명을 창조하시고 허락하신 하느님이야말로 영광과 찬미를 받으심이 마땅하다.

 

  그러니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오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우리가 삶의 질곡으로 인해 결코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불안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으며,모두가 함께 내일도 아침 해를 바라보자. 혹여, 그렇지 못한 이웃들이 있다면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

 

 

 

너와 내가 다를 때

서로 듣는 것

그리고 말하여 소통하는 것

 

서로 약속하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최소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