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 30주일 2019년 10월 27일(다해)

모든 2 2019. 10. 27. 21:30

 

시모네 마르티니「망토를 자르는 성 마르티노」

1313~18,265×230cm,프레스코 벽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 마르티노 경당

 

 

  + 루카 복음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뜰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씀의 향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임종택 미카엘 금사리 주임

 

  어린이 미사 때 신부님께서 열정적으로 강론을 하시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슬퍼하실 거 같아서 눈을 똑바로 뜨고 더 열심히 듣는 척했습니다. 어쨌든 신부님 강론의 결론은 항상 똑 같았는데, 기도 열심히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1교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학교에 올 때부터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결국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교실 나무 바닥에 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생선을 먹고 왔는지 토사에서 비린내와 역겨운 냄새가 올라와 온 교실에 퍼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칠판 앞에 멍하니 서서 양손을 휘저으며 누가 저것 좀 치우라고 소리만 지를 뿐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리에 강론시간에 말씀하신 신부님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냉큼 교실 뒤편에서 걸레와 양동이를 가지고 와서 그 토사를 치웠습니다. 저는 토사를 치우며 선생님께 칭찬받을 일과 앞으로 친구들이 나를 좋은 아이로 봐줄 것에 대한 기대,그리고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며 앞으로 잘해 줄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토사를 치우고 나자 친구들은 내 몸에서도 비릿한 역겨운 토 냄새가 난다며 놀려 댔습니다. 선생님도 저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도 냄새가 난다며 원하면 조퇴를 시켜준다고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다음날 만난 그 여자아이는 내가 인사를 하니까 짜증을 내며 피했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신부님의 말씀은 다 거짓말이라고, 하느님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굳어져 가는 듯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성당에 가기 싫었지만 어김없이 돌아오는 주일에 엄마에게 끌려서 일찍 어린이 미사에 갔습니다. 성당 안 성체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전에는 하느님께 할 말이 전혀 없다가 점점 할 말이 생기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불평이었지만 하느님을 맘으로 만나는 거 같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는 기도를 가슴 깊은 곳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느꼈습니다. 제 안에 뭔가 그전에는 모르던 평화가 빛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을 자주 꿇어야 한다고 어린 저에게 알려 주신 신부님,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

 

39. 불교의 염주와 가톨릭 교회의 묵주는 무엇이 다릅니까?

 

"가톨릭 신자의 묵주 기도와 불자의 염주 기도는 단순하지만 매우 심오하고 뜻깊은 기도입니다... 이 두 기도는 그 명상적인 성격에 힘입어 사람들에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는 효과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습니다."(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2003년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보내는 경축 메시지)

 

  구슬을 실에 꿰어 만든 기도 도구는 가톨릭 교회와 불교 이외에 동방 정교회와 이슬람교에도 존재합니다.

  불교의 염주는 화환,화관,목걸이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말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 달라고 성모님께 청할 때 사용되는 묵주는 '장미 화관','장미 꽃다발'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 '로사리움'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형태와 용어의 유사성 때문에 묵주가 염주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다양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각각 독자적 기도 전통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염주는 불교 신자들이 108배를 하거나 기도할 때 사용하는 기도 도구입니다. 염주는 근심이 많아서 마음을 모아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처가 권한 기도 도구입니다. 구슬의 수에 따라 108주, 54주, 14주의 염주가 있습니다. 108개의 번뇌를 하나씩 없애고, 그만큼의 깨우침을 하나씩 얻는다는 뜻이 담긴 108주가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 54주는 부처가 되기 바로 직전 단계인 보살(菩薩)의 수행을 27주는 소승 불교의 위대한 수행자 27명을, 14주는 관세음보살이 14가지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40. 불교 사찰을 방문하거나 불상 앞에서 예를 표해도 됩니까?

 

"부처님 오신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자인 이웃들과 친구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눌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1997년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보내는 경축 메시지)

 

  고요한 분위기에서 명상을 하거나,영적인 장소에서 머물려고, 고찰에 배어 있는 우리나라 역사 전통을 체험하거나, 이웃 종교인들을 만나려고

사찰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불교 사찰을 방문할 때,불교 신자들에 대한 애정과 법당과 불상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고자 합장이나 예를 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그곳에서 모셔진 불상을 신앙의 대상항으로 예배하거나, 그 앞에서 복을 기원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손이 하느님의 손길로

 

  얼마 전 3개월 된 딸을 놓아둔 채,아빠는 12시간 동안 게임을,엄마는 아침 7시에 귀가해서 아기가 방치되어 있다가 질직사를 한 사건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바라보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이고~~~제발 아이 못 키울 것 같은 것들은 피임이라도 잘해라."

  "저런 것도 인간이라고 생식능력이 있어서 새끼를 낳네.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꼭 애는 저렇게 잘 낳으니 기구한 일이다. 금이야 옥이야 잘 키울 부부에게 못갈망정.."

 

  우리는 그들과 뭐가 다른가, 피임이 해결법이라 말하는 이 세대가,이웃을 바라보는 자세가, 여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신 하느님이 아기를 세상에 보내신 연유를 다시금 묻고 또 묻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이 아기를 통해 우리의 닫혀진 마음과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해 주십사 기도하게 됩니다.

 

  생명의 존엄함은 최우선되어야 합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명종위기에 놓인 도요새의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나라의 가장 큰 뮤직페스티벌 추진이 멈추었습니다. 행사의 추진을 멈추고 모든 참가자들에게 환불을 기꺼이 해 준 주최측이나, 갑작스레 환불을 받게 된 이들까지도 모두 생명을 바라보는 눈도 그 마음도 어느 듯 하나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손길이 멀리 있지 않음을 보게 해 줍니다.

 

  예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원은 우리의 손으로".곧 구원이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의 손에도 달려 있음(맡기셨음),을, 우리 눈이 우리의 손이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작거나 크거나

낮거나 높거나

 

하늘 아래 주어진

물과 공기를 마시며

함께 사는 오늘

 

늘 함께 사는

오늘 우리.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