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15주일 2019년 7월 14일(다해)

모든 2 2019. 7. 14. 20:30

조르주 루오 「베로니카」1945년 경,캔버스에 유채,50×36cm,퐁피두센터,파리

 

 

  +  루카 복음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안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네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말씀의 향기>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조성준 안드레아 세종성요한 주임

 

    2000년도쯤에 유명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낙엽 쌓인 가로수길 아래서 남성이 여성에게 낙엽을 집어 던지면서 가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여성이 이렇게 말하면서 떠나갑니다. '날 채워 줘'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2% 부족할 때'라는 메시지로 끝을 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 문득 그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라는 그 말마디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학자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과연 누가 우리의 이웃일까요? 보통 이웃이라고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복음에 등장한 율법 학자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니까, 이웃의 정확한 범위를 정해달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한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일명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 죽기 직전의 상태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미 시체인 것으로 보였겠지요.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시체를 만지면 부정을 타기 때문에 일정 기간 하느님의 제단 앞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단에 봉사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율법을 지킨답시고 확인해 볼 생각도 안 하고 멀찍이 피해 가 버립니다. 그런 그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평소 유대인들에게 조롱을 당했던 소외계층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됩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필요한 간호와 관심,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2%,아니 그 이상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뭔가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공부가 좀 부족하고, 또 어떤 친구는 착한 마음이 좀 부족하고, 또 어떤 친구는 건강이 부족합니다. 이런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우리기에 우린 서로가 그 부족함을 채워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다른 친구는 이미 채우고 있어서 그 친구에게서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고, 또, 다른 친구의 부족함을 때때로 이미 내가 채우고 있어서 내가 그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누가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찾아본다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보다 잘났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해도 분명 그 사람에게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평소에 나와 사이가 좋았든 아니든,나한테 무언가 도움을 주었든 아니든,오히려 나에게 피해를 주었든, 그런 모든 것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도움을 줘 보도록 해 봅시다. 내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줄 때 그가 나의 이웃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 주면서 살아봅시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

 

13. 부모의 종교가 서로 다른 경우에 자녀의 신앙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얘야, 평생토록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죄를 짓거나 주님의 계명을 어기려는 뜻을 품지 마라.

평생토록 선행을 하고 불의한 길은 걷지 마라.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을 거둔다."(로빗4,5-6)

 

  가정은 기초 신앙 공동체이며 최초의 학교이므로 부모는 하느님을 알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으므로 자녀를 교육해야 하며, 자녀의 첫째가는 주요 교육자입니다.

  부모의 종교가 서로 다를 경우 자녀의 신앙 교육은 부부의 신뢰와 합의를 전제로 합니다. 혼인에 앞서 가톨릭 신자 배우자는 앞으로 주어질 자녀들이 세례를 받도록 배려하고, 그들에게 신앙교육을 해야 할 자신의 의무를 가톨릭 신자가 아닌 배우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상대방 역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녀를 교육하려고 할 경우, 가톨릭 신자 배우자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면서 상대방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는 지혜로운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모범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신앙의 가치를 전달해야 합니다.

 

14. 자녀를 이웃 종교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에 보내도 됩니까?

 

"자녀 교육의 양도할 수 없는

첫째 의무와 권리를 지닌 부모는

학교 선택에서 참다운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인 교육 선언 6항)

 

  교육은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권이므로 자라나는 모든이는 도덕 가치를 존중하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도록 교육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부모는 자녀의 이러한 권리를 잘 알고 양심에 따라 자녀가 다닐 학교를 참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학생교육은 현대 사회의 다원성을 고려하고 정당한 종교 자유를 보호하며 도덕적 종교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모가 노력해야 하고 사회는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 아래 부모는 이웃 종교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에 자녀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을 지키는지, 그 교육시설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교육이 자녀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지를 각별히 살펴야 합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님~!!!"

 

 

  종종 졸업생들이 휴가를 내서 일부러 모교를 찾아오곤 합니다.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다 지치면 어느 날 문득 지나간 학창시절이 그리워지나 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오랜만에 만난 졸업생들이 저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재밌게 대화를 하다 보면 제자들이 난데없이 저를 갑자기 '팀장님'혹은 '부장님'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온 엉뚱한 호칭에 제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큰 실수나 한 것처럼 매우 당황해하지만 저는 제자들 덕분에 새로운 직책을 얻게 된 것 같아 웃음이 납니다.

 

  4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불렀던 호칭이 6개월도 안 된 직장생활에서의 호칭에 밀리는 걸 보면 만난 세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학교와는 다르게 직장에서는 팀장님 혹은 부장님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만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칭이 입에 붙게 되고 어디에서나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됩니다.

 

  제자들을 돌려보내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과연 주님과 얼마나 자주 마주칠까? '주님'이라는 호칭이 내 입에 자연스럽게 붙을 정도로 주님과 매일  만나고 있는 걸까?"

 

  오랜 세월 주님을 알아 온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얼마나 자주 주님을 만나고 있는지를 졸업한 제자들의 실수를 통해 새삼 알아갑니다.

 

  매일 만나는 주님이 아니라 드문드문 만나게 되는 주님이시라면, 주님을 입에 올릴 때마다 어딘가 어색해지거나 나도 모르게 더듬거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기도의 맨 앞에 계신 '주님~"을 입에 올리는 그 순간부터 위로와 기쁨이 되어 주시는 아름다운 호칭을 한 점의 어색함 없이 부를 때까지 부지런히 매일 주님을 만나러 갑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밝혀주는

한 줄의 시(詩)

 

사랑.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