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14주일 2019년 7월 7일(다해)

모든 2 2019. 7. 7. 22:00

폰토르모「마리아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1528년 경,202×156cm, 패널에 유채, 카르미냐노,성 미카엘 수도원

 

 

  +  루카 복음 10,1-12,17-20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루를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루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말씀의 향기>


  돈주머니와 식량보따리,여분의 신발  -유정의 바오로 당진성모병원장-

 

  낙후된 구도심이 유명세를 타고 활성화되면 사람들이 몰리고 유동 인구가 늘어 납니다. 상권이 커지고 거대자본이 유입되면, 치솟는 임대료와 생활비를 기존 주민들이 감당해 내지 못해 밖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 현상인 "둥지 내몰림(젠트리피 케이션)"입니다. 비단 입소문 난 구도심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리"에서도 둥지 내몰림은 벌어집니다. "쾌락적 소비주의"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 진즉부터 우리 신앙의 거룩한 자리가 삶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는 영적 젠트리피케이션이 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는 "쾌락적 소비주의"와 우리를 현혹시키고 평범하게 만드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기스르는 투쟁으로 신앙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아 내야 한다고 이미 언급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루카 복음서에서만 유일하게 기록된 일흔 두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전한 격려사입니다. 예수님은 파견의 여정에 둘씩 짝을 진 제자를 보내며, 자기의 힘만으로는 좋은 일꾼이 될 수 없기에 기도를 수반한 행동을 하라고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험난한 길에서 겪게 될 진통이 예상되지만 그럴수록 "환대"가 나의 위안이 될 수 없고"가난함"으로 내적 힘을 얻는,지혜로운 파견 여정이 되길 당부하십니다. 돈주머니와 식량보따리, 여분의 신발도 그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 제자들의 가난을 강하게 요구하시며 세상 속에서 더욱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의.식.주의 과도한 집착과 도를 넘는 소비 욕심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없애버립니다.

 

  기도와 가난은 파견받은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갖춰야 할 필요 요건입니다. 쾌락적 소비주의를 견제하는 장치가 이 두 덕목이라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현혹하고 평범하게 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라 살도록 "참신앙 밖 터로 몰리는 영적 젠트리피케이션을 극복하는 길은 두 덕목을 꼭 쥐고 사는 일입니다. 두둑한 돈주머니와 식량보따리, 여분의 신발을 곱게 지니고 싶은 소유욕을 갈구하는 우리들에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옥중서신은 우리의 마음을 결연하게 합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이 주는 온갖 달콤한  것들... 이제 이 모든 것을 끊고 우리 주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천상의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영원한 구원을 위해 불멸의 가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한국천주교회와 이웃 종교  - 주 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

 

11.  이웃종교를 믿는 가족과는 어떻게 지내야 합니까?

 

  "에사우는 마흔 살 되던 해에 히타이르트사람 브에리의 딸 여후딧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들은 이사악과 레베카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창세 26,34-35)

 

종교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과 관련되고 개인의 근본적인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족 사이에 종교가 다를 경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많은 이들이 되도록 한 집안에서 한 종교를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에, 심지어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가정의 화목은 동등한 가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다른 종교를 믿는 가족을 억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이끌 수도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다른 믿음을 가진 가족을 언제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대하며 그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을 희망하면서 꾸준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좋은 기회가 있을 때 말과 모범으로 그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해야 합니다.


12.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을 배우자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까?


"혼종혼인(混宗婚姻),곧 가톨릭 신자 배우자와 비가톨릭신자 배우자 또는 세례를 받지 않은 배우자 사이에 맺은 혼인을 교회는 그 본분상 항상 큰 염려로써 지켜보아 왔다.... 교회는 혼종혼인을 하려는 이들의 준비와, 그리고 이미 혼종혼인을 맺은 이들을 돌보기에 주의 깊게 배려한다."(바오로6세, 자의 교서 혼인에 관한 규범 「혼종혼」(Matrimonia Mixta),1970년 3월 31일).


   하느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공동체를 이루는 혼인을 제정하시고 이들의 결합이 완전해지도록 혼인성사를 통하여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며 가장 작은 신앙공동체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신앙을 위해서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신자와 혼인하도록 가르칩니다. 배우자가 될 사람이 가톨릭신자가 아닐 경우, 가톨릭 신자인 배우자는 교회의 허락을 받아 가톨릭 신자가 아닌 배우자와 혼인을 하여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부부생활과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혼인 준비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는 신앙을 배반할 위험이 없음을 선언해야 하며, 이러한 자신의 의무를 배우자에게 알려야 합니다.(교회법 제 1125항 1참조). 이러한 허락 없이 이웃종교의 신자와 혼인 생활을 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는 이 사실을 본당 사목자에게 알리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교회법 제 1156-1165항 참조).

 

 

 
삶이란 

낮 동안

밤까지

그렇게

하느님께

기록되는 것.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