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 17주일 2019년 7월 28일(다해)

모든 2 2019. 7. 28. 21:00

벨라스케스「마르타의 집을 방문한 예수님」1619~20,60×103.5cm,캔버스에 유채,런던,내셔널 갤러리

 

 

  +  루카 복음 11,1-13

 

  <청하여라,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말씀의 향기>

 

  마침내 이루어질 때까지 줄곧 졸라 대본 적이 있는지..   - 박종훈 안토니오 세종. 충남가톨릭사회복지 회장 겸 요셉의마을원장 -

 

  1차 시도 :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2차 시도 :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3차시도 :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4차 시도 :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5차 시도 :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6차 시도 :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명을 찾을 수 있다면.."

 

  본인이 제시한 숫자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됐는지, 아브라함은 마치 흥정이라도 하듯,다섯씩 열씩 점차적으로 숫자를 줄여가며 간청을 드립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구함을 떠안고 조심스레 간청을 이어갔던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도 소돔 땅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처음 제시한 숫자에서 다섯을 감하고, 열을 가하고, 거기서 또 열씩..숫자를 낮출 때마다 조심스러워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하느님은 매번 흔쾌히 용서에 대한 확답을 주셨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리라 이미 마음먹고 있는 데 반해, 아브라함은 주눅이 들어 한번 더 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송구함을 무릅스며 기왕 흥정하듯 요청한 김에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그곳에서 단 한 명을 찾을 수 있다면.."하고 간청했다면.. 아니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 역시 당신 모상대로 만든 사람임에 분명하지 않느냐?"고. "그토록 존귀한 '사람임'을 보아서라도 요서할 수 없으시겠냐?"며 끝까지 매달리며 간청했다면.. 감히 말씀드리건대,조금 더 용기를 내어 끈질기게 청했다면(오늘 복음에 나오는 표현을 빌린다면 '줄곧 졸라 대면') 분명 원하는 바를 얻었을 겁니다. 물론 ㅇ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따릅니다. 바로 "바른 지향"과 "선한 내용"그리고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앞서 제시한 조건을 전제로 조급함에 지치고 지속되는 침묵에 실망하고 송구함에 지레 겁먹어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질 때까지 줄곧 졸라 댈 수 있는 끈기와 용기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필요한 만큼 다 얻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한국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히 편찬-

 

17. 가톨릭 신자가 아닌 가족의 장례는 어떻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그리스도인은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화되어 부활을 향한 희망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사목헌장 22항).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은총에 힘입어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분이 돌아가셨을 때, 고인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맡겨 드리며 고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 유자족의 도리입니다. 또한 죽을 위험에 있는 가족에게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례를 권면하는 것 역시 가족에게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례를 권면하는 것 역시 효과 사랑의 적극적 실천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 아래 가족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종교의 예식에 따라 치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경우에 가톨릭 신자는 "주님! ○○○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하고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가족과 친지 가운데 이웃종교를 믿는 이들의 사정을 배려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애덕의 실천입니다. 이웃종교예식으로 고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할지라도 고인을 위해서 위령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하는 것 또한 가톨릭 신자의 본분입니다.

  가족 가운데 자신만이 홀로 신자일 경우, 사전에 대부모나 주변의 교우들이나 소속본당 사목자와 상의를 하고, 장례예식과 관련해서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8. 가톨릭 신자가 아닌 조상이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성제를 드렸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032항)

 

  돌아가신 조상과 가족의 종교를 막론하고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을 위해서 언제든지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기일이나 위령의 날에 고인을 기억하며 그를 위하여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고인의 뜻을 존중하여 고인이 믿던 이웃종교의 예식을 주선하고 이를 거행한 이웃종교인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과 지역의 풍습대로 고인을 좋아하던 음식을 정성껏 차려 제사를 지내고 성묘하는 것도 고인과의 각별한 유대를 드러냅니다.

 

 

 

소리도 눈부신 빛이다


 

  천주교 대전교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독특한 메뉴가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리 대전주보'라는 메뉴가 바로 그것입니다.

 

  메뉴를 클릭해 보면 눈으로 주보를 읽으시기에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주보를 낭독하고, 그것을 녹음해 들려주는 '귀로 듣는 대전주보'코너임을 알게 됩니다.

 

  매주 눈으로만 읽던 주보를 귀로 들어 보니 정말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주보를 천천히 읽어 나가시는 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들이 이런 멋진 일을 하고 계신지 궁금해 '소리 대전주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다가 잔잔한 감동을 받고 말았습니다.

 

  낭독 녹음은 '서울성동장애인종합복지관 녹음봉사회'회원분들에 의해 2008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무려 10년 넘게 한 주도 빠짐없이 봉사활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보 글은 눈으로 읽는 거라고만 생각했던 제 생각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부끄러웠습니다. 주보는 누군가에겐 귀로도 들을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신 분들의 마음에 감사했습니다.

 

  흔히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듣기엔 참 좋은 말인데,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는 무심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분들을 잊곤 합니다.

 

 묵묵히 10년 넘는 세월 동안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이크 앞에 앉으신 분들을 통해,빛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귀에 들리기도 하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변변치 않은 제 글도 누군가에게 한 줄기 소리 빛으로 낭독해 주셨을 분들을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보이기도 들리기도 하는 신비한 사랑의 빛으로 오신 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에 지는 해가

달리보이는 것은

종일토록

우리의 삶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