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2019년 6월 16일(다해)

모든 2 2019. 6. 16. 22:30

 

틴토레토「성 마르코의 기적」

1562~66,396×400cm,캔버스에 유채,브레라 미술관,밀라노

 

 

  +  요한 복음 16,12-15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향기>

 

  삼위일체는 사랑입니다  -김영직 사도요한 다락골성지 전담

 

  어느듯 여름에 성큼 다가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호경 안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잘 녹아 있습니다. 성부(하느님)는 홀로 계시지 않고, 성자(예수님)는 홀로 구원하시지 않으며, 성령(보호자)은 홀로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이름 안에서 아멘(그대로 될 것이다)입니다.

 

  가끔 세상 안에서도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즘 인기가 많은 야구에서는 감독과 선수와 팬들의 응원,즉 삼위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함께 하나를 이루고 어우러지는 것은 더 크고 멋진 모습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슬프고 힘든 것은 바로 혼자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넓은 광야에 홀로 던져진듯 놓인 시간은 바삭 마른 모래알처럼 넘기기 힘듭니다. 반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은 꿀보다 달콤합니다. 밥 한 술이라도 뜰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으면 참 맛있습니다. 내가 병들어 누워있을 때, 내 옆을 지켜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무척 행복합니다.

 

  예전에 들은 귀한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나 혼자 하려고 하면 걱정이 되고 두려울 때가 많지만, 같이할 때는 힘이 모아져서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같이 할 때는 서로에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고, 상대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혼자 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 는 있지만, 그 힘과 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할께할 때 그 과정과 결과가 더 위대한 것은 그 시간 안에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들에 나가면 클로버가 지천입니다. 하나의 줄기에 세 개의 잎사귀가 사이좋게 붙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주보이신 파트리치오 성인은 세 잎 클로버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셨다고 합니다. 각각의 이파리들은 고유한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광합성,너는 물 흡수, 너는 양분 얻기."

 

  삼위일체 하느님은 곧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는 왠지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셋은 안정적이고, 서로를 의지할 수 있어 좋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첫째,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요한 16,13)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5. 가톨릭 교회는 이웃 종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성령께서는 인간의 실존적 종교적 물음의 근원에 계시며,...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 민족, 문화, 종교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역사적 순례의 도상에 있는 인류를 이롭게 하는 모든 고귀한 생각과 활동의 원천이십니다."(교회의 선교 사명,28항)

 

  가톨릭 교회는 이웃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청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생활 양식과 행동 양식, 계육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인간의 실존적 종교적 물음의 근원에 계시며 인류를 이롭게 하는 모든 고귀한 생각과 활동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민족들의 역사 속에, 문화와 종교 안에 복음을 준비하시므로 가톨릭 교회는 이웃 종교인들과 대화하면서 성령의 활동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지혜와 사랑으로 이웃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언하는 동시에, 이웃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 자산과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해야 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 이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헌장 16항)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께서 보내 주신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과 아는 이들보다 자기 탓 없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들 가운데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하느님의 은총 아래 살고 있으며,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이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구원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에 응답해야 합니다.

 

 

 

박음질 한 번이

 

 

  1995년에 국내에 개봉되었던 "허드서커 대리인"이라는 코미디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며칠 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영화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사를 독차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던 이 회사의 이사 '머스버거'씨의 단골 양복점 주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는 머스버거가 맞춘 양복바지의 허리부분을 제작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만하면 다 됐나? 아니야.. 한 번만 박음질하라고 그랬지만 그래도 그분이 늘 내게 잘 해주셨으니 이왕 이면 한 번 더 단단하게 이중으로 박음질을 해드려야지"

 

  그런데 이 한 번 더한 박음질은 나중에 머스버거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실수로 빌딩에서 떨어질 뻔한  머스버거를 허수아비회장 노블반스가 바지를 잡아 간신히 구하게 되는데 이때 바지 허리부분이 조금씩 찢어지며 위기를 맞이합니다.

 

  한 번만 박음질해도 된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바지는 더 이상 찢어지지 않고 결국 이중박음질은 머스버거의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악역 중에 악역이었던 머스버거에게도 감독이 이런 행운을 부여한 건 관객들에게 한 가지 희망을 남겨 놓으려고 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며 살아가게 되지만,하느님은 우리 죄를 먼저 계산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베푼 사랑을 먼저 헤아리신다는 희망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선하거나 의로운 일이 어쩌면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는 하느님의 단단한 박음질일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사랑의 마음으로 길을 나서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꽃들은 제각기

 계절이 된다.

 

꽃은

시간의 끝에서

 

환하게 피고

소리 없이 진다.

 

주(主)께서 주신

우리도 그렇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