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

[이주향의 신화,내 마음의 별]야곱의 꿈

모든 2 2019. 3. 10. 06:28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야곱의 꿈

 

 

샤갈, ‘야곱의 꿈’, 195×278㎝

 

 

  고대 이집트의 세트는 왜 그렇게 형 오시리스를 잡아먹으려 했을까요? 형에 대한 시기가 분노가 되고, 그 분노와 질투를 견뎌내지 못한 세트는 마침내 형 오시리스를 살해합니다.

 

  죽은 오시리스가 부활의 신이 된 것은 오매불망인 아내 이시스 덕입니다. 남편의 시신 조각조각을 찾아 맨발로, 미친 채로 이집트 전역을 누빈 이시스의 간곡한 삶이 없었다면 오시리스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요? 이럴 때 <연금술사>에서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그 명제가 힘을 발휘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온 마음을 다해 원하게 되는 것, 욕심은 아니겠지요? 욕심은 간절할수록 추합니다. 간절할수록 빛나는 것, 오시리스를 이집트의 부활의 신으로 승격시킨 그것이 어찌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자의 욕심이겠습니까? 파울로 코엘료의 명제는 과대망상으로 범벅이 된 욕심과 지극한 열망을 구별할 줄 아는 자에게만 의미를 가지는 명제라 믿습니다.

 

  그나저나 형제 혹은 자매가 있나요?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좋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지만 못마땅할 때는 손톱 밑의 가시 아닌가요? 우리는 형제 혹은 자매를 통해 처음으로 경쟁을 배웁니다. 그러니 형제인 오시리스와 세트가, 가인과 아벨이 적대적인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형제 혹은 자매는 나의 반쪽이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그림자일 테니까요. 그 중에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야곱을 아시나요? 저 그림은 샤갈이 그린 ‘야곱의 꿈’입니다. 사다리 오른쪽에서 눈을 감고 있는 붉은색의 남자가 바로 형을 피해 도망 나온 운명적인 인물 야곱입니다. 샤갈은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을 붉은색으로 처리했지요? 아마도 샤갈은 야곱에게서 도망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본 모양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선택한, 축복받은 인물입니다. 한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신의 축복을, 형이 아닌 그가 받은 것입니다. 축복을 도둑맞고 씩씩거리는 형 에서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야곱은 한때 분명히 둘도 없는 사이였을 에서를 피해 달아납니다.

 

  축복을 받고 도망가지만, 야곱이 그 축복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신성한 꿈을 꾸지 않았을 테니까요. 꿈, 꾸십니까? 꿈이 잘 맞나요? 베델이라는 곳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샤갈이 그린 저 꿈을 꾸게 된 겁니다.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꿈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냥 척, 들어도 든든한 꿈, 신성한 꿈입니다. 신성한 꿈을 꾼다는 건 스스로 내면의 신성을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의식은 의식이 아는 일을 꿈으로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샤갈도 그렇게 느껴 야곱을 불안한 붉음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샤갈은 야곱의 사다리를 친근하게 표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땅에서 시작하는 게 인상적이지요? 신은 그릴 수 없으니 그리지 않았고 대신 신의 손길인 천사들을 그렸습니다. 베델에 이르러서야 도망자 야곱은 신의 손길을 믿게 된 거지요. 이제 그는 자기 꾀와 머리로 살았던 삶을 진심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내려놓으라는 말, 많이 듣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내려놓으라는 말을 몰라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고 집착하고 쌓아놓은 그것 이상의 힘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그건 내려놓는 게 아니라 에서처럼 빼앗기는 겁니다. 내려놓을 수 없는데, 내려놓아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은 강박증이고,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는 건 죄책감을 키우는 좋은 방법입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노예도덕에 길들여지는 방법입니다.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내려놓을 수도 없고, 자연스레 힘을 빼며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내가 무엇을 내려놓을 수 없는지,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어디서 무기력해지고, 어디서 다치는지 그것을 느끼고 돌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그림이 두 편으로 되어 있지요? 그림의 오른편은 왼편과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불안한 야곱이 꿈을 꾸고 나서 맞이하게 될 삶의 내용 아닐까요? 복잡한 그림이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일곱 촛대를 품은 천사입니다. 네 날개를 가진 천사가 어떠한 고난에도 지켜줄 것 같습니다. 야곱 속의 수호천사 같지요? 

 

꿈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걸까요, 자연에서 와서 무의식을 자극하는 걸까요?

알 수는 없지만 기습적으로 다가와 인생의 지도를 펼쳐 보여주는 강렬한 꿈, 야곱의 꿈같은 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