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북유럽의 제우스 오딘, 눈을 바치다

모든 2 2019. 3. 10. 06:20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북유럽의 제우스 오딘, 눈을 바치다

 


용상, 흐리드스칼프에 앉아 있는 오딘, 1865년, Ludwig Pietsch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융은 충격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울울창창한 원시림에서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누군가를 집어삼킬 요량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융의 곁을 지나가는 꿈이었습니다.


  세상에, 융의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진 걸까요? 융도 그 꿈을 무릎이 후들거리며 혈관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융은 나중에 그 늑대가 보탄의 늑대, 오딘의 늑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딘의 용상 옆에서 충성스러운 개처럼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저 늑대, 바로 신성한 늑대입니다. 융은 그 꿈을 기독교가 도래되기 이전 보탄을 섬겼던 민족의 후예인 어머니가 보탄(오딘)의 늑대와 함께 조상의 나라로 합류한 거라고 해석합니다.


  오딘, 북유럽의 제우스입니다. 게르만족 전쟁의 신 보탄의 또 다른 이름으로 두 마리의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그는 누구보다도 용맹스럽고 대담하지만 어쩐지 제우스와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명상의 힘을 아는 사색적 존재니까요. 


  오딘은 애꾸눈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으니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없지요? 그는 지혜를 얻기 위해 눈을 바쳤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내어줘 본 적이 없는 자가 진심으로 집착의 본성을 이해했다 할 수 없듯 지혜에 상응하는 뭔가를 내놓아 본 적 없는 이가 지혜를 지혜롭게 쓸 수 있을까요? 오딘은 지혜의 샘을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에 용기 있게 눈을 바친 것입니다. 오딘의 눈은 미미르의 샘물 중심에서 썩지 않고 지금까지 반짝인다면서요? 지혜의 샘물이 영원히 맑게 솟아나는 건 지혜를 사랑해서 눈을 바친 신 때문입니다. 


  지혜의 물을 원했다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지요? 어리석음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고 지혜에 이르는 오솔길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전쟁의 신 오딘의 지혜는 관념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인 것입니다. 종종 외롭고 권위적인 리더가, 반대하는 측근이 없다는 이유로 독선적인 결정을 해놓고 고독하나 지혜로운 결단이었다며 착각하고 도취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어리석음을 인정할 줄 모르는 경직된 그에게는 영원히 지혜의 샘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오딘이 눈 하나가 없이도 당당하고 멋있는지 알겠습니다. 표정에 묻어나는 자신감과, 그 자신감에서 오는 대담한 행위들 때문이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침으로써 진짜 소중한 것을 얻는 그 용기가 어쩐지 친숙한 건 사랑하면서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는 우리 안에 제대로 살고 싶은 갈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정(靜·고요함)으로부터 지혜가 나온다면서요? 삶이 창으로 찔리는 듯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어찌 마음이 고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통 중에 고요한 자, 그가 바로 오딘입니다. 그는 자기 의지로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창을 찔러 넣어 세계나무 이그드라실의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심장을 찌른 거지요. 그렇게 심장이 찔린 채로 아흐레 밤낮을 매달려 삶 저편의 세계, 죽음을 만난 겁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 오딘, 그는 스스로 고통의 길을 선택해 고통의 심연을 만지며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나저나 세계나무 이그드라실이 뿌리를 적시고 있는 샘이 어떤 샘들인지 아십니까? 운명의 샘, 질투의 샘, 그리고 미미르가 지키는 지혜의 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운명과 질투가 범벅이 되면 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해질지. 운명과 질투의 샘에 뿌리를 적시고 있는 삶이라면 당연히 상처 입은 영혼이 되는 거지요. 왜 오딘이 죽음을 선택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도 우리처럼 기습적으로 덮친 운명과, 사랑의 이면인 질투가 만들어내는 생명의 드라마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겁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처럼 운명과 감정에 끌려다니며 대하드라마를 만들지 않고, 스스로 운명과 질투를 해소할 수 있는 곳, 지혜의 샘을 찾아간 겁니다. 


  인격자는 많이 배운 자가 아니지요? 많이 가진 자도 아닙니다. 인격자는 희로애락으로 고통스러울 때 자기감정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감정들을 돌볼 줄 아는 자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지혜에 도달한 오딘은 그 지혜로써 고통에 시달리지도, 고통을 외면하지도 않고 고통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얻은 겁니다. 


  삶이 나를 공격해 무릎이 푹푹 꺾이고 슬픔이 솟구쳐 올라 심장을 칠 때 스스로 심장에 창을 찔러 넣은 오딘을 떠올리면 뜻밖에도 내 안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은 뜨락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깊은 뜨락 한가운데 그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진정한 내가 자리 잡고 있음을. 융은 그 나를 진정한 자기(selbst)라고 했습니다. 그 자기가, 아파하며 울고 넘어지고 헤매고 갈등하는 현실의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거지요. 심연 속의 자기를 발견한 자는 오딘처럼 두려움 없이 저벅저벅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 당당하게 세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는 분명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고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며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