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찔레/이근배

모든 2 2018. 8. 12. 22:00




찔레/이근배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힌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슴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어찌 잊으리,첫사랑의 '달디단 전율'을


  산딸기,싱아,까마중,찔레···. 어린 날 집 근처 산길에서 많이 따먹던 식물들이다. 산딸기는 복분자라 불리며 요즘은 재배도 하는 모양인데,아무래도 복분자보다 산딸기가 예쁘다. 복분자의 한자 어원 때문에 술도 복분자주라 흔히 부르지만,나는 아무래도 산딸기술이 좋다. 까마중도 싱아도 참 맛있었다. 달콤한 군입거리에 길든 요즘 아이들의 입맛으로는 까마중 열매나 싱아 같은 풀이 맛있을 리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잊힌 풀이름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기억 되는데 문학은 퍽 쓸모 있는 징검다리인 것 같다.


  찔레는 시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나무다. 그 이름 '찔레'만으로도 영감을 주지만 그 존재 자체가 어딘지 시와 사랑의 비유처럼 연결되는 특별한 식물 중 하나다. 이근배 시인의 '찔레'도 사랑을 노래한다. 아릿하게 아픈 첫사랑의 느낌. 시는 '찔레'라는 이름의 어감과 찔레순의 씁쓰레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맛,찔레꽃의 청신한 향기까지 절묘한 그 어떤 사랑의 그림자를 찔레덤불에 겹쳐놓는다. 청춘,이루지 못한 사랑,뭐 이런 것들이 그 이름 위로 지나간다. 시는 연하게 돋아난 가시껍질을 벗겨내고 먹어야 하는 찔레순의 아릿한 저항의 느낌과 떫은 듯 입 안 가득 번지는 향기 속에서 머뭇거린다. 시인은 "어찌 잊었겠느냐"며 '달디단 전율'을 떠올리지만, 찔레만의 달콤함은 어딘가 까칠하고 성마른 달콤함이다.


  시인은 찔려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거기엔 스스로 알몸인 채 자신의 가시를 기르며 펼쳐진 찔레덤불이 있고,너를 꺾으며 내가 꺾인 순간들의 찔레순 향기가 번져오기도 한다. 가끔은 '새순 돋는 가시 껍질째 씹던'청춘의 캄캄함과 헛구질이 있고,'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러버린 불혹'이라는 고백을 '찔레'를 빌려서야 말하는 시인의 회한이 있다. 불혹이 되도록 사랑에 눈을 못 뜨면 인생에 이루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이라고 시인이 노래할 때 찔레 덤불 가시가 통째 아프다.


  이근배 시인의 또 다른 노래가 '찔레'에 겹쳐진다. '세상의 바람이 모두 몰려와/내 몸에 여덟 구멍 숭숭 뚫어 놓고/사랑소리를 내다가/슬픈소리를 내다가/(···)/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이다가/달빛이다가/풀잎이다가/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눈먼 돌이다가/한 밤 새우고 나면/하늘 툭 터지는/그런 울음을 우는'(「자진한 잎」부분)시인이 찔레덤불에 겹쳐 우는 가을이다. 가을날 봄 꽃을 추억하는 아픈 날도 가끔은 있어라.


-김선우




자진한 잎 /이근배


세상의 바람이 모두 몰려와

내 몸에 여덟 구멍 숭숭 뚫어 놓고

사랑소리를 내다가

슬픔소리를 내다가


이별이 아니면

저별?

산사태가 지고

해일이 오고


둥둥둥 북이다가 징이다가

꽹과리이다가 새납이다가 장고이다가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이다가

달빛이다가

풀잎이다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

눈먼 돌이다가

한 밤 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우는



  '자진한 잎'이란 국악 용어로써 數大葉(삭대엽): 빠르고 큰 곡을 말한다. 보통 노래 반주 대신 관악합주 또는 독주로 할 때 우조(羽調)즉 두거(頭擧)중간에 조를 바꾸는 변조두거(變調頭擧)와 계면조(界面調)의 두거 그리고 같은 계면조의 평롱(平弄),계락(界樂),편삭대엽(編數大葉)등 6곡을 '자진한잎'으로 묶는다. 경풍년은 가곡중 첫 번째,염양춘은 다섯 번째 곡인 두거를 노래없이 관악기로 연주하는 곡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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