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거미 / 이면우

모든 2 2018. 5. 12. 10:58




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니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떠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을 안다
캄캄한 배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속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시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2001)



 거미의 조상은 고생대의 삼엽충이라 한다. 또한 거미는 곤충이 아닌 거미강 거미목에 소속된 동물이다. 중생대와 신생대를 거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종이 번식하면서 지금처럼 지상으로 진출했지만 원래는 땅속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미라고 다 거미줄을 치는게 아니고 거미줄을 치는 정주성 거미와 그렇지않은 떠돌이 사냥꾼 배회성 거미가 있다. 거미줄은 인장력과 탄력성이 뛰어나고 단위 굵기의 강도는 강철 보다도 강하여 미국에서는 영화 '배트맨'의 출시와 때를 같이하여 방탄조끼나 낙하산 줄 등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캐나다 등 의료선진국에선 몸속에서 분해되는 수술 봉합실로 이미 사용 중이라고 들었다.


 매일 촘촘히 그물을 짜고 늦은 밤이면 그것을 스스로 먹어치우고 다시 짜내는 거미의 속성을 눈여겨 보는 일은 시인이 아니라도 흥미로운 일이다. 시인은 '망을 짜는 거미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미줄을 뒤흔드는 그 흔들림의 배면에서 생존을 위해 벌이는 먹잇감과의 사투와 그 외로움을 '안다'고 했다. 보일러공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면우의 일터는 기술신용보증기금 대전지사의 지하 보일러실이다  중졸이 학력의 전부이며 철들자 곧바로 공사판을 떠돌다 대청호변 산자락에서 버섯농사를 짓던 어느 겨울날 시가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의 큰형이 보내준 박용래의 시집 <먼바다>가 40대에 접어든 그의 감성을 깨웠던 것이다. 

 종잇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으며 불기 없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내 몰래 아이 몰래 쓴 그의 시는 '밥을 위한 노래'였던 것이다. 그의 다른 시 <화엄경배>에서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돼지고기,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눈물이 저 불길 속에서 함께 타올랐다" 처럼 거미의 필사적 거물짜기를 같은 시선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의 시는 보일러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삶과 문학을 한 몸으로 이어주는 '용접의 언어'이자 슬픔도 가난도 다 녹여버리는 '용해의 언어'다.

 

 그의 시에는 경험치 밖의 풍경이 거의 없다. 삶의 진정정이 짙고 은은하게 배어있는 시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가 그대로 읽힌다. 시인은 '필사의 그물짜기를' 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는지 모르겠다. 한때 그는 '새마을'을 하루에 한갑씩 피워대던 골초였고 애주가이기도 했으나 20여년 전 세상에 막 태어난 아들을 위해 단박에 금주와 금연을 결심했고 그 결심이 지금껏 지켜지고 있다. 그는 어떤 자리에서도 술을 입에 대는 법이 없다고 하니 삶의 치열함을 넘어 필사적이다. 그의 지독함은 곧장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자 그로서는 최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경건함이다. 삶이 문학보다 큰 보일러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그의 시를 읽으면 나는 늘 부끄럽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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