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동그라미/ 민병도

모든 2 2018. 4. 13. 22:40




동그라미/ 민병도

 


사는 일 힘겨울 땐

동그라미를 그려보자

아직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리

물소리에 길을 묻고

지는 꽃에 때를 물어

마침내 처음 그 자리

홀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여,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 시집『내 안의 빈집』(목언예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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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일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면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조언을 흔히 한다. ‘인생, 그 뭐 있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말은 과욕을 버리고 자족하면서 살자는 뜻이라기보다는 왠지 적당히 눈 감고 대충 즐기면서 살자는 뉘앙스가 더 짙게 풍긴다. 그런 친구에게 힘들 때 동그라미를 그려보라면 놀고 있네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라 넌지시 일러준대도 선뜻 따라나설 것 같지는 않다.


 공동체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성 가운데 하나가 원만한 성품이다. 교육현장에서도 회사 조직에서도 원만을 가르치고 요구하지만, 실은 둘레와 조직과의 마찰이나 갈등 없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부르곤 했다. 채근담에서는 원만에 반하는 사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성품이 조급한 사람은 불과 같아서 무엇이든 만나면 태워버리고, 인정이 없는 사람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죽이며,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고집이 센 사람은 고인 물이나 썩은 나무와 같아서 생기가 이미 없으니 큰 공로를 세우거나 복을 오래도록 누리기 어렵다.”


 원만이라 함은 불의에 타협하지 아니하되, 쩨쩨하지 않고 유연하며 담대한 성품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4년 전 이맘때 한은총재로 지명된 이주열씨가 청문회를 거쳐 임기 4년의 총재에 취임했다. 당시 이주열씨를 내정하면서 "판단력과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었으며, 합리적이고 겸손하여 조직 내 신망이 두터워 발탁했다"고 했다. 물망에 오른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발탁된 데에는 아마 새로운 절차인 청문회 관문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오늘 또 다시 그의 청문회를 지켜본다. 이례적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이주열 총재를 연임시킨 표면상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70년대 후반 후암동 독신자숙소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람으로서, 내가 본 그는 소신과 유연성을 겸비한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호락호락 않은 민주적 감수성의 강단도 지닌 사람으로 알고 있다. 나와 룸메이트인 손 모씨가 이주열씨와 연세대 동기라 가끔 방에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조사부가 핵심부서다. 통화정책의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거시경제를 디자인하는 중요한 파트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난하게 때로는 두루뭉술하게 정부정책과 궤를 같이 해왔는지 몰라도 장차에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한은 조사부의 역량을 강화하고 필요할 때는 정부에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독립된 중앙은행의 수장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 나라 경제를 위해 담대한 동그라미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임을 다시 믿으며 기대하는 바 크다. 이야기가 잠시 곁가지로 새버렸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은 마음을 둥글게 여미어 보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통 큰 담대함을 스스로 깨우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었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는걸 보면 얼마간의 제동이나 단념도 물론 필요하겠다. 자연에 몸과 생각을 맡기고 허허롭게 동심으로 한 바퀴 돌아 처음 동그라미를 시작할 때의 그 점에 마침내 당도하면 크고 둥근 '텅빈 충만'의 세계 하나를 갖는다.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의 동그라미는 밀실인 동시에 광장이다.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환하게 소통되는 그 광장의 그림은 또렷해도 경계가 없다. 그것은 영혼의 영역이며 사랑의 영토이기도 하다. 삶을 들여다보려면 삶 바깥으로 나오고, 사랑을 보려거든 사랑 밖으로 나오라. 자맥질하는 이 생명의 계절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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