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신부 (2013,갈매못 소성당 감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 마태오 복음. 11,2-11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요한이,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드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말씀의 향기>
의심 없는 기다림 -"우리 삶이 풍요로울수록 자선의 요구는 더욱 커집니다.
-이진용 베드로 유성 주임
복음에서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며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의심을 품고 오실 분이 메시아신지를 묻는 요한의 마음은 착잡하였을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명쾌한 답을 대시하여 '너희가 복 들은 것을 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가 오래전에 예고한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현상의 사건들을 보고 들려주심으로써 당신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덧붙이시기르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요한뿐만 아니라 많은 사라들이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하고 메시아 아니라고 말하며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메시아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하느님이 직접 인간으로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또 마지막 날에 우리를 구원하려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세속의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온갖 시련과 고통으로 아파하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주시는 분이 오십니다. 그분께서 오시는 날이 참된 구원의 날이요, 해방의 날입니다.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는 삶의 대림의 의미이며, 영원한 기쁨의 성탄을 맞이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해 누구도 소외됨 없이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유가 있어야만 자선을 통한 나눔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당장 내가 힘든데 누구를 도와줄 수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눌 수 있어야 참다운 자선입니다.가진 사람들이 더 갖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여우가 아닌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자선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 때문에 억지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 사라오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마음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누는 자선을 통해 기쁨의 성탄,따뜻한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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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교회의 새로운 복음화 ③
가정 성화주간에는 가정 소공동체 모임과 가정 과제를 수행합니다. 이 주간에 묵상하고 나누어야 할 성경은 주보를 통해 미리 공지가 됩니다. 가정 소공동체 모임 때에 각 가정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눕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지를 생각해서 '복음적 개인활동'으로 정하고,가족이 함께 실천할 '공동활동'도 정하게 됩니다. 이 복음적 활동의 결과는 다음 번 소공동체 모임 때에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말씀과 삶을 나누고 말씀을 살아내기 위한 작은 실천을 하는 이 가정 소공동체 모임이야말로 "가정 교회의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어 내는 가장 큰 원천이고, 실제로 이 가정 소공동체모임을 통해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월 마지막 주간을 가정 성화주간으로 보내고 그 다음 주 금요일,그러니까 매월 첫 금요일에는 '가정 봉헌 미사'와 '성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성시간에 봉독되는 말씀은 모든 가정이 '가정 소공동체 모임'때에 묵상하고 나누었던 그 말씀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여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시간에는 성체 앞에 앉아 조용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영혼을 살피며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초를 봉헌하기 위해 엄마를 따라 제대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어린이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요? 자신을 위해 초를 봉헌하며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 본 이 어린이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온 마음으로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마음에 담고 성장한다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하더라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겠지요. 신앙은 이렇게 삶의 모범을 통해 전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온 가족이 함께 성시간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작은 뒷풀이'를 할 것을 강력히 권장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정성스런 마음으로 미사와 성시간까지 참례했으니 함께 둘러앉아 피자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작은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시간이 끝난 뒤에 '신부님,오늘은 미사 왔으니까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키킨을 먹을 거예요.'라고 자랑하며 신낭게 돌아가는 어린이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큰 포근함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이 따뜻함이 바로 미사와 성시간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닐까요?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거룩하시도다(Sandtus) 6 -구조와 내용 3
세 번의 "거룩하시도다" 라는 환호 이후에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을 부릅니다. 여기서 '온 누리'는 군대,만군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말로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저항하거나 이길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통해 느끼고 체험합니다. 그렇기에 천상과 지상에 가득한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하며,"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높은데서 호산나!"라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3)>
새 땅보다 새 눈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그런 곳만 골라 목숨 걸고 여행을 떠나는 오지전문 탐험가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의 특이한 여행 이력은 한 방송국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죠. 그의 행적을 취재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수개월 동안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오지탐험의 현장이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습니다.
방송 마지막 날,긴 탐험 끝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리포터가 탐험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새로운 시가을 갖는 것입니다." 온갖 위험을 감내하고 오지만 찾아다닌 여행의 결론이 '새 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새 눈'에 대한 것이어서 의외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딘가 있을 새로운 땅에 목말라 하며 살아가기 마련인 우리들... 자신이 서있는 이곳보다 더 풍요롭고 더 안락한 그 어딘가를 가슴에 품으며 오늘의 고통을 견뎌 내지만, 그 땅은 결코 그렇게 쉽사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땅에 대한 미련도 희미해지고,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뿐입니다.
수많은 박해와 고난의 길을 걸으시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일깨우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들이 예수님께 새로운 '땅'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 새로운 눈을 가진 사람만이 새 땅을 발견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땅은 어떤 특정한 곳이 아니라,언제나 늘 거기 그렇게 우리 앞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아집과 오만이 우리를 눈멀게 하고 엉뚱한 '오지'를 꿈꾸게 했을 부이죠.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이전에 있던 것이 여전히 여기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거라는 성경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탐험가 덕분에 알아 갑니다.
새해가 다가올 때마다 새 땅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기도를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새로운 눈을 갖게 하소서! 내 눈에 잔뜩 끼어 있는 허영과 오만의 백태를 거두어 내 주소서! 그리하여 지금껏 내게 보여 주셨던 그 축복의 땅을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소서! 오늘의 햇살이 오늘만의 기적이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예쁜 마음의 향기는
어디든 날아가
아름다운 희망의
꽃을 피웁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인권주일 담화 -한국천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묵시 21,3)
역사의 구체적 여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는 것은 교회의 구원사적 소명이며 사회교리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의 전례는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보내고 있으며 이 기간중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특별히 한국천주교회는 대림 2주를 인권 주일과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하여 인간의 존엄과 신앙인의 지상 소명에 대해 묵상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실로 인간의 존엄과 소명은 주님 강생의 신비와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의 상황 안에서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는 것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백주년」53항)이고 가톨릭 사상의 핵심이며,사회적 가르침의 근본 원리(「어머니의 스승」219항)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시도에 부단히 맞서왔고 그러한 상황을 고발해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창조개획에 어긋나는 오늘의 상황을 더욱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올 한해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권력의 불법적 선거개입과 이에 대한 은폐축소 시도는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밀양 송전탑 건설 강행,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강행등 공권력의 과도하고 부당한 행동 역시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국제연합(UN)의 세계인권선언이 규정하는 사회적 정치적 권리,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보조성 원리가 뜻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시민의 자유와 이를 위한 국가권력의 한계와 제한입니다. 특히 정보기관과 경찰,그리고 군대 등 국가의 권력기구를 시민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본질입니다. 국가권력이 법률과 사회적 합의로 정한 한계를 넘어선다면,권력은 그것 자체로 불법이며 시민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에 대한 침해일 따름입니다.-중략-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이 존엄한 것은,성경이 강조하듯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성자께서 인간으로서 인간 가운데에 사셨기 때문입니디.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동행하고 연대(마태오복음 25장)하면서,우리 사회가 더욱더 인간의 존엄성이 보호되고 증진되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강생 신비의 참된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해야겠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김운회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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