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목동 수녀회/수채화
안종찬 바오로/한국영상대학교 교수
+ 마르코 복음.1,21-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말씀의 향기>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실천하는 사랑' -서용원 다미아노 교정사목 전담 보좌
오늘 예수님은 첫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들으며 '새로운 권위'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악령 들린 한 사람이 회당에서 큰 소리를 치며 예수님의 신원을 외쳤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예수님은 그 사람을 찬찬히 들여다보셨습니다. 오랜 시간 악령에 시달린 사람에게 온전한 모습이라고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매달 세 번씩 목요일마다 국립법무병원에 있는 중독환자와 정신질환자들을 만나 미사를 합니다. 그 형제들과 만나 미사를 하거나 고해성사를 드리면 평범한 이야기를 건넬 때도 있지만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저에게 건네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도 최대한 귀 기울이려고 노력합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눈높이와 자유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무언가 억눌려 있는 사람은 얼굴에도 행동에도 심지어 말에도 그 증세가 서려 있습니다. '억눌림'은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악'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자유의지'의 모습도 아니고 행복을 지향하는 '하느님의 사람다움'도 아닙니다. 창조된 그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예수님께서 우리 가까운 데로 내려오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당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던 것은 언변의 다채로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러하였다면 율법학자들 또한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부 하느님에 대하여 실천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마저 하느님의 도구가 되도록 말입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시는 기적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를 수 있습니다. 가르쳐주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르쳐면서 실천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보여진다면 '악령 들린 사람'마저 '온전한 사람'으로 되찾아집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보게 된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는 실천의 가르침, 사랑입니다.
2월의 첫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신앙생활도 주 그리스도의 움직이는 실천으로부터 비롯해야 합니다. 그것은 전하는 신앙, 사랑이고 나눔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는
실천의 가르침, 사랑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48)>
공기 반 소리 반
양념 반 프라이드 반도 아니고, 물 반 고기 반도 아니며, 기대 반 걱정 반도 아닌 '공기 반 소리 반'이라뇨? 오디션에 참가한 무명 가수 지망생은 순간 어리둥절해집니다. 심사위원이 애정 어린 충고로 던전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표현을 그는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 이후로, '공기 반 소리 반'은 그 심사위원의 단골멘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공기 반'은 소리가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라는 뜻일 것 같고, '소리 반'은 지나치게 소리로만 노래를 가득 채워서는 안 된다는 뜻 같습니다.
사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소리'입니다. 목소리가 풍성하고 정확하게 울려 나오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소리를 곱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건 어찌 보면 '소리꾼'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겁니다.
이런 까닭에 가수 오디션에 도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대한 목청껏 노래 부르고, 청중들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내고 있는 가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곤 합니다. 하지만 소리만 큰 노래들은 어딘가 모르게 공허함을 남깁니다. 귀는 놀랐는데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또한 일종의 노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마치 노래를 음미하듯이 듣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기도가 만약 노래와 같다면 하느님의 심금을 울리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어떤 기도여야 한 마디 한 마디에 영혼이 담겨져 전달될 수 있을까요?
'공기 반 소리 반'의 비밀은 기도에도 통할 것 같습니다. 내 목소리로만 가득 찬 기도는 소리만 커지고 고함 소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목소리에 울림과 공감이 생기려면 빈 공간이 필요합니다. 내 가족, 내 건강, 내 월급, 내 명예, 내 물건으로 가득 찬 기도보다 누군가의 삶도 함께 더불어 숨 쉴 수 있는 '공기 반'의 그런 여유 공간 말입니다.
공기와 소리의 결합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만들어지듯, 나와 당신의 결합으로 진실한 기도가 완성됩니다. 공기를 통해 소리가 더욱 풍성해지듯, 당신을 통해 나의 기도는 더욱 성숙해집니다. 미사 시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공기 반 소리 반이라면, 그 또한 아름다운 성가만큼이나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듣기 좋은 노래가 되지 않을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주님!
수많은 욕심과 거정
내리고
따르겠습니다.
아침과 저녁이 오듯
자연의 순리로
따르겠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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