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주님 세례 축일 2015년 1월 11일(나해)

모든 2 2015. 1. 11. 22:00

갈매못 성지/수채화

안종찬 바오로/한국영상대학교 교수

  

 

+  마르코 복음 . 1,7-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때에 요한이 이렿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말씀의 향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박양신 안드레아 신합덕보좌

 

  자신이 세례 받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유아세례를 받은 경우는 다르겠지만,세례받은 때를 생각해 보년 뭔지 모를 큰 은총을 받음에 기뻐하며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사실 세례성사의 은총을 누리는 모습인 것이고, 그러기에 세례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큰 영광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렇게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진 세례성사가 얼마나 크고 가치있는 영광의 성사인지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으로 다시금 드러내 보이십니다.

 

  세례의식의 기본적인 의도는 지금까지 지었떤 죄에 대해 물을 부어 씻어주겠다라는 용서와 화해의 의식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죄를 씻어냈으니 새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회개의 의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기본적인 의도를 뛰어넘어 더 큰 의미를 본인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보여주십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회개의 의식이라는 세례 본연의 의도를 뛰어넘는 더 큰 의미,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물을 부어 죄를 용서해 주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세례의 본연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시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아드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광인지,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몸소 보여주시기 위함이고 윌도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구세주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돌아보는 것은 나 자신의 세례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하느님 보시기에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성찰하여 너희도 나처럼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에 참여하라는 예수님의 독려의 말씀입니다.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고,어려울 때 사람들은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이에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를 받은 때가 초심이겠지요. 자칫 신앙생활이 삶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아니라 바담과 어려움으로만 다가오는 시렴의 시간으로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자신이 세례받을 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이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한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듯이, 하느님을 향하는데 있어서 나를 버리고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구원을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세례의 은총을 통해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이 구원사명을 완성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도 이미 세례 때 주어인 은총을 되뇌어 보며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합시다.

 

  주님 세례 축일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진례력으로는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한번의 세레로 구세주의 사명을 시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한 번의 세례로 영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연중시기의 일상생활에서 구세주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일상의 성실한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예수님께서 들은 음성을 우리 자신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46)>

 

썸 그리고 섬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얼핏 말장난 같은 이 노래 가사가 작년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연애 밀당 중인 청춘 남녀 사이에서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 났었죠.

 

  "내 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상태를 젊은이들은 '썸'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썸'타는 관계는 나름 긴장감이 있어 좋습니다. 이쪽저쪽 어느 쪽에도 치우치치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부지런히 계산을 해야 하니까요.

 

  또 이런 관계는 깔끔한 게 장점이기도 합니다. 애매하게 매달렸으니 이별의 순간이 찾아와도 서로 애매하게 대처하면 됩니다. 울고불고 매달리는 그런 촌스러움으로 쓸데없이 자손심에 상처를 내지 않고,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깔끔한가요?

 

  하지만 이 '썸'타는 관계는 '공허함'의 한계를 갖습니다. 외롭지만 상처 받는 건 싫기에 적당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이어가는 관계.. 이런 관계 안에서는 서로 손해 볼 건 없지만 서로 채워 줄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처 받지 않고 안전지대에만 머물고자 한다면 결코 진정한 사랑의 영토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아프더라도 '고슴도치 딜레마'를 해결해야 합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 체온을 나누어야 하는데 다가가자니 상대방 바늘에 찔릴 것 같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니 얼어 죽을 것 같다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현명한 고슴도치들은 이런 상황에서 바늘에 찔리는 아픔을 선택합니다. 상처가 두려워 추위 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것보다,고통스럽지만 상처를 통해 함께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최적의 거리를 찾아내 서로를 살려 냅니다.

 

  더불어 살고자 한다면 그만큼의 무너짐 또한 감수해야 합니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상대방의 달콤함만 취하겠다면,그것은 바늘에 찔리지 않고 상대방의 체온만 빼앗아 가겠다는 어리석은 고슴도치가 되는 겁니다 

 

  사랑의 영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찔리고 무너지는 아픔을 감수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썸'만 타면 외로운 '섬'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삶으로 삶을 경계하며

순리와 이치가 통하는

사회가 되도록

맑음으로

우리를 씻어 주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