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4년 주보

연중 제19주일 2024년 8월 4일(나해)

모든 2 2024. 10. 18. 15:03

 

죽림리공소(홍성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2023년

 

 

+ 요한복음 6,24-35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신앙은 참여하는 것 - 원유진 아드리아노 전의 주임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 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사람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답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서 교회도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죄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내 삶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고 그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현실의 삶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실에서 이해 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가 복음에 비추어 무엇이 인간다워지는 길인지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그러한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과 무관한 듯 침묵하고 종교적 예식과 자신들만의 형식을 지키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거절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공동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에서 필요한 것을 전달하며, 인간다워지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리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영역을 따로 정해놓고 세상과 자신들을 분리하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종교일뿐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며 인간과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다면, 교회는 그 일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세상 안에 존재하려고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참함과 고통에 침묵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권위만을 내세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각자가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전교구 관련 인류복음화서 자료 소개 6

1948~1949년 서울대목구의 연례보고서와 선교상태 일람표

 

  연례보고서에서 노기남 주교는 ‘성직자의 상황(Status Cleri)’이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서울대목구를 떠나 대전으로 향한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해서 언급한다. “2) 성직자 상황: 작년에(1948년) 라리보 주교는 프랑스 선교사 19명과 한국인 신부 2명과 함께 새로운 대전 선교지로 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3명의 프랑스 선교 사가 우리 대목구에 남아 있습니다.”

인류복음화성 역사문서고, Nuova Seria, vol. 1786(1950-1952), rubr. 36-3, prot. 224/50, f. 484r.

 

서울대목구의 선교상태 일람표에서 1948년 6월 30일까지는 19명의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사제들이 있었지만, 1949년 6월 30일 자에는 3명만 서울대목구에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에서 연중 감소에 대한 이유로 프랑스 신부들이 새 로운 선교지인 대전으로 떠났다고 기록했다

 

인류복음화성 역사문서고, Nuova Seria, vol.1786(1950-1952), rubr. 36-3, prot. 224/50, f. 486v.

 

-권영명 안드레아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전례 일반과 미사의 Q&A 

 

8. 성모 승천 대축일에 대해서 (1)

 

성모 승천 대축일의 의미

 

  우리나라에서 8월 15일은 “광복”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인 우리들에게는 동시에 또 하나의 축제를 기념하고 있으니, 바로 “성모 승천 대축 일”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745조에 따라 이날은 의무 축일이라고 전합니다.

  “한국 교회의 의무 축일은 모든 주일주님 성탄 대 축일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과 성모 승천 대 축일이다.”

 

성모 승천에 대한 교리 내용은 무엇일까요?

 

  사실 성모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의 승천에 대한 기록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성모님의 무덤의 소재나 유해에 대한 기록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승천에 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성모 승천에 대한 언급은 4-5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처음으로 성모 승천에 대해 밝힌 인물은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오 (315-403)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성모 승천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하느님 흠숭과 성모 공경을 구별하면서 지나친 성모 신심을 경고했다고 전합니다. 이외 4-5세기경 쓰여진 예루살렘의 디모테오 설교 사본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이 승천했다는 신앙 고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승천을 증언하는 구절들과 고백들, 그리고 신학적인 근거와 신심에 의한 고백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 교의를 반포 합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제2차 바티칸 공의 회에서는 성모 승천과 관련하여 교회 헌장 59항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 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주님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 참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그렇다면, 왜 8월 15일일까요?

 

  8월 15일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5세기 초 예루살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베날레 주교(422~458) 시대에 예루살렘 근처 카티스마에 세운 마리아 성지의 봉헌 기념일 “하느님의 어머니” 축일이 8월 15일이었던 것에서부터 유래됐다는 점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날은 후에 성모 무덤 성당에서 기념 되다가 6세기경 명칭이 “성모 안식 축일”로 바뀌었고, 황제 마우리치우스(582~602)는 제국 전체가 이 축일을 지내도록 선포하기로 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이러한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와서 8월 15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질문은 tjubo@djca.kr 메일 발송해 주세요!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성지를 걷다_합덕성당(2)

 

2. 착한 목자 

 

  합덕성당 성전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더불어 지역민의 근대 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성전은 제7대 주임 신부였던 백문필 필립보(필립 페랭, 파리외방전교회, 1921-1950년 재임)신부에 의해 지어졌다.

 

  백문필 필립보 신부는 성전을 지을 때, 당시 서유럽 사제라면 당연했던 제단을 동쪽으로 짓는다는 기본적인 개념을 포기하고, 당시 부락에서 가장 잘 보이는 방향으로 성전을 지었다. 윤리적으로 가정에 어려움이 많았던 지역의 성화를 위해 주보도 ‘성가정’으로 봉헌하였다. 더욱이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방인 성직자들과 교우들을 피난시키고 당시 회장과 복사와 함께 성당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신리에서 성 다블뤼 주교의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현재 하느님의 종(시복 대상)에 올라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찾기(83)

 

했던 말 하고 또 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한 번 들었던 이야기를 또 똑같이 여러 번 듣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1. 이미 들었던 이야기니까 솔직하게 그 사실을 말한다:

“그 얘기 예전에 했는데…”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매너’와 ‘예의’ 라는 단어가 그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엄청 무안해할 것이고, 그것으로 그 사람 과의 관계에 금이 갈 수 있기에, 우리는 웬만하면 그런 방식으로 상대방의 되풀이되는 말을 단칼에 자르지 않습니다.

 

2. 지루하지만 꾹 참고 대충대충 순간을 모면한다:

“아, 네… 아, 네… 저런…”

 

  우린 부지불식간에 이런 태도를 취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의 없이 대꾸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 씩 불편해집니다. 나의 속마음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티를 안 내려해도, 영혼 없이 건성건성 답하 고 있음을 상대방이 모를 리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보다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 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3. 똑같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다:

“정말요? 그래서요? 그렇겠군요…”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될지라도 마음 안에는 특별한 무엇 인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최소한 세 번은 다르게 들어 보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처음 들을 때에는 당연히 그 이야기 자체에 집중해야 합니다. 듣는 도중에 판단하지 말고 정확히 들어야 합니다.

 

  한 번 들었던 이야기를 두 번째로 듣게 될 때는 스토 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어떤 풀리지 않는 감정이 있는지를 헤아려 봐야 합니다.

 

  어떤 억울함, 어떤 후회, 어떤 분노, 어떤 슬픔이 그렇게 풀리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 안에 맴도는지 조용히 들여다보면 알고 있던 이야기도 새롭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을 때마다 이렇게 번역해서 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주면 좋겠어요.”라고… 그러면 그 순간은 사랑의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기도 중에 우리도 주님께 했던 말을 하고 또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되풀이되는 그 말을 자르시지도, 건성 으로도 지나치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더 따듯하게 안아 주시기만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제 똑같은 따뜻함으로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 볼 차례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