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촌공소(합덕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
+ 마태오 복음 25,1-13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질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혼자'의 삶이 아닌 '함께'하는 삶 - 임우택 살래시오 대전교구 평신도사도직 단체협의회 회장
공경하올 교구장 주교님과 총대리 주교님, 사제 수도자, 세상 속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 분.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봉사하는 평신도들에게 쉰여섯 번째 맞이하는 평신도 주일에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으로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삶을 위축시키는 ‘거리 두기’에 익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보다는 거리를 두는 것이 안전한 삶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서로 만나서 웃고 이야기하던 평범했던 일상이 고독과 소외의 일상으로 바뀌며 많은 신자가 교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미사 참례율과 판공성사 참여율이 눈에 띄게 낮아지고, 신자들이 하느님과 멀어지면서 마음은 의도치 않게 얼음장처럼 식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생태계 파괴는 우리와 후손들이 살아가는 지구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감사하게도 “코로나 엔데믹”이라는 새로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평신도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마치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탕자와 같이 잠시 교회를 떠난 형제자매들과 거리를 좁히고 ‘혼자’의 삶이 아닌 ‘함께’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교회 안에서도 개인, 단체 그리고 본당 공동체 차원에서 지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자비를 실천하여, 가난과 소외 때문에 슬퍼하거나 외로워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생태계 파괴와 기후 환경 변화는 우리의 자연환경의 위기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보건, 외교 통상 등 전분야에 걸쳐 극단적인 변화를 야기함으로 지구를 살리기 위해 생태적 회개를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의 절제와 검소한 생활,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고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 탄소중립 실천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주일에 “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구성과 운영을 위해 봉헌해 주시는 특별헌금으로 교구의 평단협 운영, 한생명 운동, 지구 및 단체 행사의 후원, 교육활동 그리고 자선 활동 등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부의 동전 한 닢과 같은 정성된 마음으로 봉헌해 주신 평신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자주 모심으로써 타인의 모범이 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합시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건전한 평신도 사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과 하시는 모든 일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13)
'아래로부터' 그리고 '함게'만드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
‘교회는 무엇입니까?’ 혹은 ‘교회는 누구입니까?’에 대해 정답이라고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교육받은 신자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교회는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생활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과 배워서 알게 된 ‘정답’과 적지 않은 괴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에게 교회는 ‘하 느님의 백성’, ‘친교 공동체’이기보다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분되고 상하위계가 명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는 1985년 프랑스 파리의 대주 교에게 보낸 서한(Epistula tua)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교회는, 거룩한 창설자의 명백한 의지에 따라, 두 부분 즉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양떼와 목자로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 목자들에게만 가르치고 판단하고 지도하는 모든 권한이 주어졌고 신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들의 판단에 순순히 복종하며 그들이 통치하고 바로잡고 구원으로 이끌도록 따라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그리고 교황 성 비오 10세와 교황 비오 12세에게서도 동일한 내용의 진술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되기 이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 안에 모인 하느님의 백성 이다”(『교회 헌장』 4항). 자신들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순수한 사랑과 은총으로 불러 모으신 백성이다. 그렇기에 모든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일한 존엄성과 자유를 누리며 사회적 지위나 인종과 성별의 차이가 상위·하위 계층의 구분과 동일시될 수 없다(갈라 3,26-28. 참조). 이브 콩가르(Y. Congar)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 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와 평신도 – 각자의 고유한 삶의 조건과 직무에 따라 구별하기에 앞서 먼저 공통되는 가치들”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교황 프란체스코는 『복음의 기쁨』 119-120항에서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이다.”라고 하며 성직자 역시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이기도 하며, 평신도 또한 성직자의 가르침과 사목적 보살핌을 받는 수동적 대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선교의 주체임을 말한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인 자비와 섬김,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밀알의 방식, 복음적 가난과 겸손을 따른다.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자기중심적 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자만을 제거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데 거부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며 여정을 함께 걷는 길동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한산 주임-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2. 미사 해설 - 성찬 전례(26) : 영성체 예식 - 평화 예식(1)
평화 예식 126. 그 다음에 사제는 팔을 벌리고 분명한 목소리로 기도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사제는 손을 모은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교우들은 응답한다. ◎ 아멘. |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 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7,15).
제자들이 두려운 마음에 문을 닫아걸고 다락방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오시어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굳게 잠긴 문을 열어주시고,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듯 제자들에게 허락된 “그리스도의 평화” 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닫힌 문을 평화로 열어주십니다.
영성체 전 이루어지는 평화 예식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해, 평화와 일치를 간구하고, 또한 하나의 빵을 나누기에 앞서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예식입니다. 우리의 평화의 인사는 하나 의 빵을 나누기에 앞서 하느님의 자녀들끼리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몸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룩한 사랑의 행위라고 바라본다면, 우리 역시 이 사랑의 행위에 동참하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기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향한 입맞춤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 베드 5,14). 이 인사는 주님을 향한 공통된 믿음과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공동체원들을 평화로 묶어 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 예식은 “서로 사랑하기 위한” 우리의 작은 몸짓이며, 주님의 평화에 발맞추는 거룩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미사 때 평화의 예식을 통해 평화로 인도받고, 평화를 나누며, 평화로 하나가 되기 위한 초대를 받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로 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다음 편에서도 평화 예식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나' 그리고 '우리'부터 시작하는 '쉬는 교우 선교'(2)
쉬는 교우는 누구일까요?
3년 이상 신앙을 쉬면서, 판공성사를 보지 못한 분들일까요?
‘냉담’은 ‘잘못’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아픔’입니다.
20년 이상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도,
1년이 되기도 전에 교회를 떠나는 새영세자들도,
어쩌면 믿음이 약해지는 모든 순간에 우리 자신도 잠재적인 냉담자일 수도 있습니다.
정하상교육회관에서 진행되는 ‘쉬는 교우 찾기’ 복음선교교육은 ‘나’ 그리고, ‘우리’의 사목적 회심에서부터 시작됩 니다. ‘쉬는 교우’분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같은 출발선에 서서 주님을 다시 찾고, 함께 만나는 복된 만남과 동반의 여정에 모든 본당의 형제자매님을 초대합니다.
-글 관장 김민희 바오로 신부-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68)>
그럴 만두
어느 늦은 가을밤, 동네 어귀의 작은 만두가게. 손님도 없고, 가게 유리창 너머로 졸다 깨다를 반복하 며 TV를 보고 있는 주인아주머니의 모습만 보입니다.
“요즘 늦은 밤 주인 혼자 있는 가게만 골라 금품을 빼앗는 강도가 자주 출몰한다고 합니다.”
TV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주인아주머니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 눈과 귀를 텔레비전 화면에 모으기 시작 하려는데, 마침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서둘러 들어섭니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그 손님은 만두 1인분을 주문하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펼쳐 읽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드디어 주문한 만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손님은 만두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점점 불안해하는 모습입니다. 조금 전 들었던 흉흉한 뉴스에 주인아주머니도 덩달아 불안해집니다.
순간, 손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인아주머니를 향해 다가옵니다. 아주머니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헌데 손님은 짧은 인사만 남기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갑니다.
행여 강도가 아닐까 잔뜩 겁먹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아주머니는 손님이 황당하게 그대로 남기고 간 만두를 치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두를 치우다 말고, 손님이 보던 신문의 펼쳐진 부분을 보게 된 주인아주머니는 깜짝 놀랍니다. 거기엔 이런 기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최근 만두 속에 치명적 식중독 유발하는 재료 사용하는 만두가게 늘고 있어...”
신문 옆에는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세어 보니 만두 값이었습니다. 주문한 만두를 먹자니 불안하고 그렇다고 그냥 나가자니 미안해서 조용히 놓고 간 만두 값...
오늘밤 손님 앞에 내어놓은 이 만두는 ‘그럴 만두’라는 생각을 하며, 아주머니는 서로를 불신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삭막함에 헛헛한 마음으로 가게문을 닫고 집을 향해 갑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늘 이렇게 되물어 보십니다. “그게 고작 이웃을 조금이라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란 말인가?”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성지를 걷다-산막골 작은재 줄무덤성지(1)
1. 산막골성지 | 하부내포 선교의 중심지
산막골은 기해박해(1839) 이후 신자들이 산간벽지로 숨어들면서 생긴 신앙 공동 체입니다. 산막골은 베르뇌, 다블뤼 주교님과 함께 활동했던 페롱 신부님의 사목 활동 근거지였고, 황석두 루카 성인이 가족과 함께 6년을 머물면서 선교사들의 복사와 한문 선생, 그리고 신자 회장을 하며 지낸 곳입니다. 다블뤼 주교님도 산막골을 방문하여 세례를 주기도 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역시 가까운 불무골에 머물 때 이곳에 와서 페롱 신부님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곤 했던 곳입니다. 산막골은 근처에 있는 많은 신앙 공동체와 함께 하부 내포 지역 선교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산막골 출신 순교자만 해도 열 분이 계십니다.
•주소 :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81번길 117(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236)
•전화 : (041)951-2089
•미사 : 매일 11시(월요일 없음)
<1분 교리>
Q-1) 교회법이 정한 신자들의 여섯 가지 의무는 무엇인가요?
① 모든 주일과 4대 의무 대축일의 미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②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③ 정한 날에 단식과 금육을 해야 합니다.
④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⑤ 혼인성사에 관한 가톨릭 혼인법을 지켜야 합니다.
⑥ 교회 유지와 사목 활동, 복음 선포를 위해서 교무금과 주일 헌금을 봉헌해야 합니다.
일회용품 사용규제
+ 찬미 예수님
최근 환경부에서 일회용품 사용규제를 사실상 폐지하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소상공인 부담 해소를 위한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아쉽습니다.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에 직접 동참하셨던 분들이라면 처음에는 다소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도 금방 익숙해짐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장바구니 사용하기, 텀블러(개인 컵) 사용하기, 일회용품 멀리하기 습관화는 미래 세대에게 최소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배려이고 의무입니다.
다음은 기사 내용 중 일부입니다.
-환경부는 이번 방안에 대해 "소상공인의 부담을 완화하고, 현장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일회용품 사용도 줄이기 위해 마련했다"라고 설명했다. 플라스틱 빨대 부분은 사용 소비자는 종이 빨대가 음료 맛을 떨어뜨리고, 쉽게 눅눅해져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의견이 나왔으며, 종이컵 사용이 금지되면서 음식점, 커피전문점 등 매장에서는 다회용 컵 세척을 위해 인력을 고용하거나 세척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재활용품 성당 수거일 안내] * 사회 복음화분과*
매월 셋째 주 (주일)
1. 우유 팩 (세척 후 잘 말려 펼침)
2. 아이스팩 (물 ×, 젤로 되어 있는 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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