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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일훈, 예수의 지문을 본다

모든 2 2023. 7. 1. 11:36

 

건축가 이일훈, 예수의 지문을 본다

최태선

 

사진출처=경향신문

 

건축가 이일훈님을 추모하는 글을 읽었다. 그분의 사위인 김형규 전 경향신문기자가 그 글을 썼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런 분들이 말없이 세상을 바꾼다.

평생 건축하고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으니, 뜻이 있는 곳에 돈이 없고 소신이 있으면 외롭다.”

그분이 하신 말이다. 참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이 짧은 말에서 그분이 지켜온 삶의 방식이 드러난다. 돈이 없어 뜻을 펼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토로가 아니다. 내겐 돈이 없어도 뜻을 지켜냈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뜻을 지켜냈다는 말로 들린다. 특히 소신이 있으면 외롭다는 말이 내 마음을 울린다. 나는 그분이 느꼈을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

“그래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옳다고 생각하신 건축을 고집하신 것은 건축이 단순히 집 짓는 기술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버님은 삶의 방식을 의문하고 제안하는 것이 바로 건축가의 일이라 생각하셨고, 평생 한순간도 그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건축이 단순히 집 짓는 기술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신념은 얼마나 귀한가. 나는 이것이 건축가로서 그가 행했던 황금률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차원이 높은 황금률이다. 상대방이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그는 건축을 통해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황금률이란 단순히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줌으로써 상대방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오리를 가자고 하는 이에게 십리를 가주는 것,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 속옷까지 주는 것,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쪽 뺨을 돌려대는 것,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달라고 하는 이에게 주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황금률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황금률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그것에서 돌이킬 수 있게 하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다. 이일훈님의 사유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그분이 임종 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만일 그분이 일찍 세례를 받았다면 그분이 자신의 신념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분의 자유로운 사유에 심각한 방해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늘날 교회는 모든 것을 통제한다. 누구건 깊은 신앙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교회가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개신교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럴 때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 파문당한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참된 신앙이나 신실한 삶과 가르침을 보게 되는 것이 우연일까. 그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톨릭에서 파문당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파문이란 진리를 좇는 그리스도인들에겐 과정인지도 모른다. 물론 파문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변방으로 나가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일훈님이 평생 수많은 가톨릭의 건물을 지으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무엇보다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분에게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본다. 사위분은 그분이 평생 단 한 번도 넉넉한 건축비를 갖고 작업을 하신 적이 없다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난을 모토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참 실감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넉넉한 건축비를 가지면 결과적으로 필요 없는 부분이 더해진다. 우리의 삶에 사치가 넘치는 것은 넉넉하기 때문이다. 넉넉하지 않더라도 사치한 것은 마음이 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는 넉넉함이 자리할 여지가 애초에 없다. 왜냐하면 항상 마음속에 더 큰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게 억만금이 주어진다면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자로 살 수 없다. 오지랖이 이미 세상의 모든 돈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넓어졌기 때문이다. 고급 차나 비싼 집 따위가 내게 주어지는 돈을 차지할 수는 없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가. 나에게 아무리 많은 돈이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결코 넉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넉넉하지 못한 상태는 창조성을 창출한다. 그것이 아름다움을 만들고 그것이 신념을 표출하게 만든다. 그분의 집에는 바로 그런 창조성이 담겨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간이 되면, 아니 우연이라도 그분이 설계하고 지은 건축물 근처에 가면 그 건축물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느껴보고 싶다.

그런 그분은 “요란한 것, 치장된 것은 모두 콤플렉스를 드러낼 뿐 도대체 당당함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참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를 향한 화두라 할만하다. 얼마 전 나는 봉천동 고개를 걸어서 지나면서 하늘을 찌를 듯 오만하게 서 있는 교회 건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찌르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는 대목에서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이일훈님이 설명해준다. 요란한 것, 치장된 것은 모두 콤플렉스일 뿐이다.

나는 거대한 성당 앞에서, 사랑의교회와 같은 웅장한 건물 앞에서 그런 사람들의 콤플렉스를 본다. 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피하라고 하셨던 ‘헤롯의 누룩’이라고 생각한다. 헤롯은 당대 최고의 건물을 지은 사람이다. 그가 지은 모든 건축물들은 오늘날에도 짓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건축물들에 담긴 콤플렉스를 보셨다. 크고자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그것은 요란한 것, 치장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요란한 것이나 치장된 것들이 아니라 당당함이다.

그분이 생각한 당당함이 무엇일까. 나는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자신과 그런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소박함을 통해 드러나고 확인된다. 졸부라는 말이 왜 있는가. 그들의 요란함과 치장이 오히려 그들의 가벼움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위는 소박하되 당당한 삶, 짧은 시간일지언정 제가 아버님께 보고 배운 전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오직 유일한 장인의 뜻을 잇고 추모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정말 부러운 관계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관계가 있을까.

사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요란한 것과 치장된 것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는 거짓을 주장한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위분이 알아본 것처럼 소박하되 당당한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경륜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공동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위한 삶이 된다.

그분은 삶의 공간을 변화시켜 세상과 사회를 바꾸고자 하였다. 비록 임종 전 세례를 받았지만 나는 이분의 이런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누구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일을 통해 세상과 사회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안다면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결국 이일훈님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도 나는 예수의 지문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예수의 지문을 보여준 이일훈님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함께 감사를 보내며 나도 그분처럼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