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포성당(아산지구)
본당설립 : 1976.9.13 / 주보 성인 : 성모성심 (사진 : 대전가톨릭사진가회)
+ 마태오 복음 9,36-10,8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말씀의 향기>
무소불위(無所不爲) - 이덕길 알바노 온양 주임
사전적 의미로 무소 불위(無所不爲)는 못 할 일이 없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 하면 ‘원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하죠.
오늘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부여하신 권한과 능력이 무소불위(無 所不爲)의 권력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 시대에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불치병인 나병 환자까지 낫게 하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줄 수 있는 능력이라면 무소불위의 끝판왕일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권위가 예수님께 부여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추수의 긴박함이 제자들에게 부여되는 권위와 능력에서 드러났습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행한 기적도 예수님께서 주신 특별한 능력에서 나왔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 라.”라는 말씀처럼, 무조건 ‘그리스도의 일들’(마태 11,2)을 선한 마음으로 수행할 때 일어나는 기적인 것이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함께 지냈던 제자들 이름을 오늘 소개하는 이유도 제자들의 사명의식이 최대로 고조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와 사탄의 영역 사이의 경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유다의 모습을 통해 봅니다. 사목자인 제 마음의 경계에도 두 영역이 늘 공존함을 깨닫곤 합니다. 특히 독단적인 판단과 상명하달식의 방법은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공동체의 일치를 위협하는 요소임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또한 본당에 파견된 사목자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신자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신자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몸이 안 좋을 때는 제 몸만 신경 쓰다가 신자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소홀할 때가 있었습니다. 취미생활을 하느라 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한 우선적 배려를 놓친 적도 있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까지는 아니겠지만, 저부터 독단적인 행위나 판단을 바꿔야 함을 반성합니다.
법치주의를 내세워 법을 앞세우는 무소불위의 세태가 혹시 교회 안에도 팽배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목자도 교회법의 매뉴얼에 따라 의무적인 사목만을 행한다면 무소불위의 행태가 남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게 무소불위의 봉사 권한을 맘껏 행사하며, 하느님 나라 실현의 희망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 특권을 거저 받은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 아닙니까!
<더 나은 우리 가정>
2.부모 - 자녀가 함께하는 시간, 늘 소중해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나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몸짓과 생각, 마음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와 친하십니다. 이 때문에 저는 제 꼴대로 살고,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과의 친밀함처럼, 부모-자녀 관계에서 친밀함은 중요합니다. 특히 자녀의 정신과 마음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부모의 존재는 언제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질 필요가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는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는 경험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일상에서 자녀의 관심과 호기심에는 늘 이런 시간과 기회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이해는 ‘지금 자녀가 무엇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 그 몰두하는 것을 통해 자녀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소속감, 효능감, 재미, 자유 등)를 궁금해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자녀가 원하는 시간과 내용으로 함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외적인 조건들보다도 자녀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해하는 순간, 부모는 자녀와 함께할 내용과 시간을 기꺼이 수용하고 맞출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는 시간은 부모-자녀 간에 마음을 연결하고 견고하게 해 줍니다. 그 연결을 시작으로 자녀의 마음에 다가가는 다양한 길이 열립니다. 자녀의 나이, 발달수준, 특성, 관심사 같은 자녀의 상황과 입장을 인정하는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부모는 공감적인 이해와 소통 역시 가능해집니다.
반대로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할 경우, 마음의 연결과 이해의 부족으로 부모는 그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타당함 만을 제시하는 데 급급해집니다. 자녀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어려운 부모는 불안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쉽습니다. 자신이 경험해 본 바, 자기 부 모와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학습되고 익숙해진 성장 방식과 교육, 문화로 자녀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이미 부모의 반응을 통제, 충고, 설득으로만 받아들이고 결과적으로 자녀 자신이 받을 내용이나 방식이 아니어서 사랑이 아닌, 박탈감이나 결핍감을 갖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열정과 희생으로 사랑했다 말하지만, 자녀는 오히려 부모로부터 무시와 상처만 받았다고 주장하며 결국 서로 억울함과 답답함을 호소할 뿐입니다(“지금이 어떤 땐데~”, “네 나이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그러니? 나 때는 말야”,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물론 부모의 입장이 객관적으로 타당할 수 있지만, 자녀는 그 타당한 이유와 입장을 아직 받아들일 수 없기도 합니다. 특히 자녀가 어릴수록, 이해만 시키려는 부모는 자신의 성숙에 따른 우월감 속에서 아직 신체적, 정신적, 마음의 미성숙한 자녀가 이해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 아시죠? 부모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내 뱃속에서 낳은 자녀라고만 여기기보다, 자녀를 좀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보세요. 관심과 흥미, 장점, 매력, 자랑거리 등).
마음과 마음 사이 다리를 놓는 것, 쉬운 일은 아니지만 천천히 충분한 시간을 가질수록 시원하고 튼튼한 다리를 만들 수 있겠지요. 그래서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은 늘 소중합니다.
-천주교대전교구 가정사목부-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48. 미사 해설 - 성찬 전례(12) : 감사 기도에 대해서(6)
2) 성찬 제정과 축성문 (3)
103. 이어서 계속한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사제는 제대 위에서 성작을 조금 들어 올리고 계속한다.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사제는 허리를 조금 굽힌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제는 성작을 받들어 교우들에게 보이고 성체포 위에 내려놓은 다음, 깊은 절을 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의하면, 성체에 대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축성을 통하여 제대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이지만 형상을 이루는 실체가 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이를 우리는 “성변화(聖變化)”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리를 바탕으로 우리는 미사를 통해 매 순간 신비를 체험하고, 기적을 바라보며, 은총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신비 앞에 늘 겸손한 마음으로 흠숭과 찬양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거양성체와 거양성혈 때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사 제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내려놓으면 깊은 절로 경배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가끔 신자분들께서 “성변화(聖變化)”의 시점에 대해서 질문을 하십니다. 물론 이 답변을 드리기에 앞서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신비의 영역이기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정확한 분석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교회의 전례적 규정과 전례신학적인 고찰을 통해 답변드리자면, 성찬제 과 축성문이 봉헌되고 나서 성변화가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성령청원:축성기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으로 구성된 “성찬제정과 축성문”이 봉헌됩니다. 성찬제정과 축성문은 거양성체와 거양성 혈까지의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양 성혈 이후 이어지는 “신앙의 신비여”는 우리는 성변화의 신비를 보았고, 이에 대한 흠숭의 의미로서 공동체가 감사와 환호의 의미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식의 흐름과 기도문들의 의미를 통해 성변화의 시점은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시간 은 신비의 영역으로서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는 시간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분석하 기에 앞서 우리들의 믿음으로 성체를 바라보는 것, 이러한 자세가 이 거룩한 시간에 우리가 봉헌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자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신앙의 신비 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천주교대전교구 성령쇄신봉사회
<6>치유묵상회
사람은 원초적으로 불완전하고 자유롭지 못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왔으므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하느님의 치유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듯 인간은 삶의 여정 속에서 환경을 통해 사람을 만나면서 또한 사건 안에서 만나게 되는 아픔과 시련,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라고 절규하며 하느님께 하소연도 하고 사람에 대해 미움과 분노를 품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죄의 뿌리인 상처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인간의 모습으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은 치유를 갈망하고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치유의 능력은 특수한 지역이나 특별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바른 믿음이 뿌리를 내리면 그 믿음의 통로를 통해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을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때문에 교구민들이 안고 있는 내적, 외적, 영적인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목적으로 2016년 제1차 치유묵상회가 2박 3일의 일정으로 열렸고 격년제로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3차에 이르기까지 130명이 이수했습니다
-김기범 시몬 신부 성령쇄신봉사회 전담-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의 학교 사목 이야기(6)
제 이름이 뭔지 아세요?
학교에 있으면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다. 종종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이 자기 이름표를 가리고 물어본다. “신부님, 제 이름이 뭔지 아세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당혹스럽다. 2, 3 학년 학생이야 대부분 알지만, 신입생의 경우에는 기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 있더라도 갑작스러워서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 정말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마치 시험공부를 안 하고 시험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다행히 이름을 불러 주고 무슨 일이냐고 하면 그냥 물어봤다면서 지나간다. 하지만 대답을 못하면 좀 시무룩해진다. 다른 이름을 대면 그 또한 별로다. 그 아이의 표정도 안 좋고 내 마음도 안 좋다. 다음에 꼭 기억하겠다고 이름을 물어보고 지나가지만 다음에 또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머리가 나쁜 건지 마음이 부족한 건지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꽃이 되어 주는 거라고 했던 가. 이름이 기억된다는 사실로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꽃은 꽃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여전히 향기롭고 아이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임이 분명하지만, 이름을 불러 주는 아주 단순한 행위로 인격적인 만남이 생겨나고 그로 인한 자아존중감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라고 느껴진다. 게다가 학창시절에는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삶이 변화될 수 있기에 더더욱 중요한 일임이 틀림없다.
루카 복음서의 자캐오 이야기(19장)가 떠오른다. 자캐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고 싶었기에 키가 작았던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 했다. 예수님은 그 나무 아래에 이르러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 물러야 하겠다.” 그 부름을 들은 자캐오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듣고서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포하셨다.
한 번의 부름으로 삶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처럼이야 할 수 없겠지만, 다만 적어도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 대건 학교만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고 성장시키는 모든 자리에서 말이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학생이 있다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교육 환경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학업 성적이나 여타 외적 조건으로 학생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봐주고 이름을 불러줄 수 있으면 좋겠다. 분명 마음이 다쳤거나 아픈 아이들에게 치유를 주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잘해야겠지만.
“예수님, 자캐오 이름 부르신 방법 좀 자세히 알려주실래요?”
-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 논산대건중 · 고교 교목-
성지를 걷다. 갈매못순교성지(1)
1. 갈매못순교성지의 다섯 성인
갈매못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다섯 성인과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바닷가로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신리(충남 당진시 합덕읍)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수하였고, 황석두 루카도 함께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이들은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진다. 배론에서 붙잡혀온 장주기 요셉은 주교님과 함께 죽게 해달라 청하였고, 이에 따라 다섯 성인이 갈매못에서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이 거룩한 다섯 순교자는 1968년 복자 품에,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셨다. 이로써 갈매못순교성지는 죽음과 슬픔의 장소가 아닌 새 생명과 기쁨이 넘쳐나는 영광의 땅으로 빛나게 되었다.
김동규 신부와 함께 하는 여정'동행' 1. 오리엔테이션
https://www.youtube.com/watch?v=7UIxpeWKeF4
<1분 교리>
Q-1) 은총이란 무엇인가요?
A)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아무 조건 없이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처럼 인간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를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총'에는 생명의 은총과 도움의 은총이 있습니다.
Q-2) 생명의 은총이란 무엇인가요?
A)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키려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를 '생명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총이며, 이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죄로부터 치유되며 거룩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당신과 같게 하시고 당신의 한가족으로 만드시는 은총이기에 '성화 또는 신화의 은총'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대죄를 짓지 않는 한 이 은총은 항구적으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Q-3) 도움의 은총이란 무엇인가요?
A) 세례성사로 부여받은 생명의 은총을 끊임없이 우리 안에 내재하도록 하며 성화 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북돋아 주는 힘을 '도움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 은총은 다양한 모습으로 주어지는데 성화 은총의 특수 양식인 여러 '성사'들과 '기도'가 도움의 은총에 해당합니다.
일회용품 미세플라스틱
찬미 예수님. 사회 복음화 분과입니다. 코로나 팬더믹 이후 우리 일상생활에서 배달 음식 문화가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일회용품의 유해성은 많이들 알고 계실 텐데요. 특히 최근에 알려진 미세플라스틱이 다회용기보다 4.5배 높다는 뉴스가 있어서 신자분들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아래는 기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국소비자원이 일회용기 16개 제품과 다회용기 4개 제품을 비교한 결과, 일회용기에서 검출되는 미세플라스틱이 다회용기보다 적게는 2.9배. 많게는 4.5배까지 더 많았습니다. 미세플라스틱은 주로 플라스틱 컵과 포장 용기의 원재료에서 검출됐는데, 성인 한 명이 일회용 컵을 통해 일 년간 커피를 마실 때 연간 2,600개의 미세플라스틱에 노출되는 셈입니다.
소비자원은 현재까지 미세플라스틱 위해성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안전 관리와 탄소 중립, 자원 재활용 측면에서 일회용품을 사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소비 형태를 변화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특히 미세플라스틱은 세포 변화를 유발하며 암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에 많이 나오고 있으니 가급적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야겠습니다.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23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 (0) | 2023.07.01 |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2023년 6월 25일(가해) (0) | 2023.06.27 |
거룩히 지극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23년 6월 11일(가해) (0) | 2023.06.17 |
2023년 환경사랑음악회-북극곰을 위한 사계 (0) | 2023.06.05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2023년 6월 4일(가해) (0) | 202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