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3년 주보

사순 제4주일 2023년 3월 19일(가해)

모든 2 2023. 3. 20. 14:14

 

합덕성당 양촌공소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2길 12(상궁리 716-24)

 

 

+ 요한 복음 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니가?"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요,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도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요?"하며,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말씀의 향기>

 

"신앙"으로 눈뜨는 사람들 - 박진용 F.하비에르 전민동 주임

 

  전·후반 경기인 ‘축구’는 전반전이 끝난 시간이 참 아름답습니다. 감독과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작전을 세우고, 후반전을 향한 희망과 용기로 경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은 지났지만, 아직도 반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의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초조하거나 두려운 마음의 게임은 질 수밖에 없지만, 사순 제4주일을 봉헌하는 우리는 초조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말씀처럼, 나약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비복음적인 것에 매달리며 살아왔던 우리지만, 지난 3주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풍요로운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을 믿고 있었고, 앞으로 남은 사순의 시간 속에서도 주님의 은총을 믿는 까닭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오늘 복음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의 사건은, 소경의 간절한 기도를 넘어 소경을 향한 ‘예수의 자비’였습니다. 세상에 눈먼 우리는 태생 소경 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우리는 지난 3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미약하나마 십자가의 예수와 내 안의 예수,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상의 빛’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후반전을 향한 희망과 용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진흙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본 것처럼, 태생 소경이 눈에 바른 진흙의 씻어냄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성사’인 예수를 본 것처럼, 이제 우리도 이 사순 제4주일에 ‘자비와 용서’로 다가오시는 예수의 구원역사를 바라볼 때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비겁함이 세상의 ‘진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세상의 어두움’을 탓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늘 ‘세상의 빛’은 신앙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적 식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암 못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씻는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영적 식별’을 향한 ‘화해의 성사’를 희망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치유되는 ‘감사의 마음’으로 ‘화해의 성사’에 임하고, 통회와 속죄의 시간을 넘어 ‘자비와 용서’로 서로의 ‘화해성사’를 이루며, 아직도 남은 사순의 시간에 ‘희망과 용기의 시간’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청합니다. 동시에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는 이 은총의 시간에 우리도 눈뜬 소경처럼, 두려움 없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시다.

 

 

 

<이주사목 대전 모이세>

 

이주사목의 기쁨

 

  작년 성주간을 보내면서 느낀 소회입니다. 작년 성주간을 앞두고, 저는 약간의 고민에 빠졌습니다. 파스카 성삼일 전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할 것 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한국어로 할 것인가? 영어로 할 것인가?

 

  사실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나를 위할 것이냐?’ 아니면 ‘이주민 친구들을 위할 것이냐?’라는 답이 뻔한 질문을 가지고, 편하게 지내고 싶은 저의 욕구 때문에 생긴 갈등인 것이죠.

 

  부임 첫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성삼일 전례를 하지 못했고, 재작년에는 한국어로 전례를 지냈습니다. 작년에는 아이들을 위해 영어로 하자고 결정해 놓곤, 스트레스를 받으며 영어 읽기에 돌입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결정해 놓곤 은근 걱정됐습니다. 왜냐하면 이주민 학생 친구들은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고 있고, 노동자 친구들은 늦게 퇴근하기에 현실적으로 많은 친구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재작년에 두 명의 친구와 함께 한 전례가 좋았기에 그 정도만 온다면 모든 수고가 헛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20 명이 넘는 이주민 친구와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성목요일 만찬 미사 중, 미사에 참례한 모든 이주민 친구의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아무런 공지도 하지 않았기에 일을 마치고 바로 미사에 참례한 이주민 친구들의 발은 그간 닦아왔던 한국 신자들의 발과는 다르게 참으로 현실적이었습니다. 발을 닦은 물은 어느새 구정물로 변해 있었지만 치열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의 노고이기에 개의치 않고 일일이 친구들의 발을 닦고 입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미사 후 담소를 나누면서, 여러 소식을 알게 됩니다. 자기들 나라에선 남자만 세족례에 참여하는데,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씻김 예식에 참여하게 되어 잊을 수 없는 경험이자 감동이라는 친구도 있고, 한국에서 11년을 살았지만 성목요일 미사가 영어로 봉헌되는 건 처음이라며 너무 좋았다라는 친구도 있습니다. 감동을 받았는지 저와 직원들에게 가족처럼 집처럼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전합니다.

 

  사제이기에… 직원들이기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주민 친구들은 그 행동만으로 감동받고 고마워합니다.

 

  단편의 사건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주사목의 기쁨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안성준 도미니코 신부 대전모이세 전담-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39. 미사 해설 - 성찬 전례(3) : 예물 준비에 대해서

 

  예물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제단에서 사제의 모습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다음과 같은 순서로 예물이 준비됩니다.

 

  빵 봉헌

사제는 빵이 담긴 성반을 두 손으로 제대 위에 조금 높이 받쳐 들고 조용히 기도한다.

 

  포도주 준비

 사제 또는 부제는 성작에 포도주를 붓고 물을 조금 따르면서 속으로 기도한다.

 

포도주 봉헌

사제는 두 손으로 성작을 제대 위에 조금 높이 받쳐 들고 조용히 기도한다.

 

봉헌 기도

그 다음에 사제는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기도한다.

 

정화 예식

이어서 사제는 제대 한쪽으로 가서 손을 씻으며 속으로 기도한다.

 

성찬례로 초대

사제는 제대로 가서 교우들을 바라보고 팔을 벌렸다 모으면서 말한다.

 

  ① 빵 봉헌 : 동·서양의 차이가 있지만, 서양에서 빵은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느님 제단에 인간의 필수적인 것을 봉헌함으로써 이 제사가 우리와 별개의 것이 아닌, 우리의 봉헌물로 이루어지는 제사가 되게 하고, 나아가 이 제사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이 행위를 통해 전달됩니다. 특히 사제가 빵을 들어 올리고 기도하는 행위는 하느님을 향한 “봉헌과 감사”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② 포도주 준비 및 포도주 봉헌 : 포도주는 구약과 신약 시대를 거쳐 교회의 중요한 음식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주를 들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흘리는 자신의 피” 라고 말씀하신 후부터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도주 준비와 포도주 봉헌 역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③ 봉헌 기도 : 미사 중에 사제가 바치는 기도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바로 주례 기도와 사적 기도입니다. 주례 기도는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회와 공동체 전체의 이름으로 바치는 공적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주로 소리를 내어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 공동체를 대표하여 바치는 기도입니 다. 이와 달리 사적 기도는 주례가 자신의 봉사 직무를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하여 개별적으로 바치는 기도로써 언제나 침묵 중에 바칩니다. 특히 예물 준비 중 조용히 바치는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 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 이 받아들이소서.” 기도는 빵과 포도주 봉헌 이후, 이어질 성찬례를 주 하느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십사 청하는 기도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성찬 전례 중 예물 준비에 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 교구 내 공소

 

합덕성당 양촌공소

  1884년 양촌공소는 두세 신부의 선교담당 지역으로 54명의 신자가 있었다. 1890년 8월 퀴를리에 신부가 양촌에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정되었다. 양촌은 합덕 성당의 전신이 되는 역사적인 장소로 1892년에 성당·사제관을 건축하고 전교활동을 하였으나 본당의 중심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1899년 합덕리로 본당을 이전하고 양촌은 공소로 변경되었다. 초대 최성용(요한) 회장이 땅을 희사하여 옛 공소를 건립하였는데 1949년 현재의 한식목구조 초가형태의 공소를 재건축하면서 옛 공소는 철거되었다. 1970년대 초가지붕을 골함석으로 교체하였고, 2017년에는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공동체 모임과 판공미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순례자의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거주하면서 공소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현재 17세대 26명의 교우가 있으며 약 17명이 성당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의 학교 사목 이야기(3)>

 

"저는 아니겠지요?"

 

  ‘메타인지’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10개의 숫자를 10초간 보여주고 몇 개나 기억하는지를 물어보면 막상 다 알 것 같다고 하면서도 두세 개만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몇 개를 기억하고 있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다 안다고 말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보다 정확하게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아이들이 학업에서 높은 성 취도를 보였다고 한다.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이러한 능력은 학업이나 기억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 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인지하는 것에서 좋은 생활 습관이 생겨난다. 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하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자기는 아니라며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또래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면 자기 잘못은 인지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잘못만을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많다. 자신의 행동을 인지할 줄 아는 아이들이 공동체 생활에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을 보면 오히려 내가 배우게 된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모든 학부모님과 교직에 있는 분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를 잘하게 하는 것도 참 어렵지만 생활을 바꾸는 것도 힘든 일이다.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결국은 다시 돌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저 잘못을 지적하기만 하면 잔소리처럼 들릴 뿐 변화하지는 못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면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해도 쇠귀에 경 읽기로 끝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결국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내가 변해야 하지 않나. 나도 내 고집대로 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데 아이들이라고 그 뜻을 따르겠는가.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변화한다는 것, 어찌 보면 우리 신앙인의 지향점이다.

 

  다른 사람만 잘하기를 바라고 나는 그대로 머물고 싶어하는 건, 결국 유다의 마음과도 비슷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할 때 유다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메타인지라는 말처럼 내가 먼저 나의 부족함을 바라 보고 하느님을 향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본다.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 논산대건중.고교 교목-

 

 

 

<1분 교리>

 

Q) 판공성사란?

A) 모든 신자가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의무적으로 받는 고해성사를 말하며 일 년에 두 번 실시되고, 공로[공()]를 헤아려 판단[판()]한다는 뜻입니다.

 

  매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전의 대림 시기 및 부활절 이전의 사순시기에 진행되는 고해성사로 가톨릭 최대 전례 시기에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참회하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이 전통이 정착된 것이 판공성사이며, 이를 이용해 신사들이 성사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를 파악합니다.

 

  고해성사는 1년에 꼭 2번 이상을 하도록 교회법에 규정되어 있으므로, 1년에 2번 있는 판공성사 때 고해성사를 받으면 의무는 채워지지만, 대죄가 있을 시에 그때그때 자주 보아야 합니다.

 

 

환경 파괴 축제

 

  찬미 예수님, 봄의 기운이 충분히 온 거 같았는데 다시금 꽃샘추위가 와서 옷장에 넣어두셨던 두꺼운 옷을 다시 꺼내 입은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한 두벌은 아직 넣어두지 말아야겠어요.

 

  오늘은 환경 파괴 축제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리는 기후 위기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인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대표적인 축제 중 제주에는 제주 들불 축제가 있고 화천에는 산천어축제가 있습니다. 자연환경에 조금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이 축제들이 상당히 지금 시대랑은 맞지 않다고 생각하실 텐데요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지역 경제를 위해서 하는 각 지자체의 생각은 알겠습니다.

 

  제주 들불 축제는 불을 놓으면 점화용 화약으로 불이 전달돼서 거기서 터지면서 불이 붙은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흑색화약이 사용되기 때문에 당연히 대기오염 물질이 많이 발생하고 화약 잔재물로 인한 토양오염, 비가 오면 토사 내 오염물질 유출이라는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화천 산천어축제도 역시 아주 잔인한 행위를 우리는 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래잡이 만큼이나 잔인한 행위들입니다.

 

  최근 41년이 지난 긴 시간 논란이 되어온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해서 허가가 났습니다. 케이블카 설치는 많은 환경적인 피해를 줄 것입니다. 문제는 설악산에만 케이블카가 설치되는 걸로 끝나질 않을 거란 게 문제입니다. 설악산이 통과됐다는 의미는 다른 산들로 다 케이블카가 설치할 수 있다는 뜻도 되니깐 말이죠.

 

  아름다운 자연 속 풍경화를 그리게 되면 이젠 그 속에 항상 케이블카가 있는 풍경 사진과 그림이 될 우리나라의 강산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