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랑하기" 김옥순 작
시간의 선물/이해인
내가 살아있기에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얼굴
오늘도 나와 함께 일어나
초록빛 새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네요
하루를 시작하며
세수하는 나의 얼굴 위에도
길을 나서는 나의 신발 위에도
시간은 가만히 앉아
어서 사랑하라고 나를 재촉하네요
살아서 나를 따라오는 시간들이
이렇게 가슴 뛰는 선물임을 몰랐네요
얼마 전에 우리 수녀원을 방문한 내 여중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니 옛 앨범과 대조해야만 그 모습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휴양을 하기 위해 본원에 들어온 환자 수녀들을 만나면, 수십 년 전 건강하고 젊은 날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찡해 오곤 합니다.
책에선 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았던 독자들이 지금의 나를 만나면 그 달라진 모습에 실망감을 표현해서 나를 종종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할 말이 없으면 곧잘 이렇게 한마디 덧붙이는데, 비록 체면상 마지못해 하는 말이라고 해도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듭니다. "왠지 전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금의 수녀님 모습이 더 좋아요."
누구라도 세월이 주는 변화는 막을 수가 없고 이 무게를 선물로 받아 안아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거울을 자주 보진 않지만 얼굴의 주름과 흰머리가 말해주는 나의 노년을 깊이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성당이나 식당에 앉아 까마득한 후배들을 바라보면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느끼곤 합니다. 빨리 가는 시간에 대한 불평과 탄식을 새로 오는 시간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대체 시간이 왜 이리도 빨리 가는지!'라고 푸념하고 싶을 때 나는 '가기도 하지만 다시 오는 시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라고 바꾸어 말해 봅니다.
어느새 인생의 오후를 살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새로 오는 시간들이 고맙고 소중하고 다시 한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 받은 기쁨에 새삼 설렐 적이 많습니다. 게으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없지 않지만, 내게 남아 있는 시간들을 알뜰하게 사용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오늘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입니다.
일상의 길 위에서 한 번이라도 더 감사하고, 한 번이라도 더 웃고, 한 번이라도 더 용서하는 수련생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내게 오는 시간을 새롭게 사랑합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은 두려움의 무게로 살아오지만 이제 그와는 못할 말이 없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그에겐 늘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시간은 날마다 지혜를 쏟아내는 이야기책 그러나 책장을 넘겨야만 읽을 수 있지 살아있는 동안 읽을 게 너무 많아 나는 행복하다.
살아갈수록 시간에겐 고마운 게 무척 많다...고 다시 노래하면서.
이해인 수녀 시인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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