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성당 누동리공소
충청남도 태안군 누동로 70-7(고남면 누동리 809-4)
+ 루카복음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의 향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이정임 바오로 대천 주임
18세기 말경 일부 실학파 지성인들의 학문적인 연구로 시작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튼 우리나라 교회는, 몇 차례에 걸친 박해로 백 여년 동안 일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와 땀은 한국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과 열렬한 사랑이 필요하며,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 즉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거기에는 고통과 죽음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고,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인 구원이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한 이타적인 마음으로 행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서 고난과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길을 따라서 고난과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만이 아니라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정성껏 미사 드리고 잘 준비하여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하느님의 사업을 실천하는 교회에 힘껏 봉사하며 희생하는 모습은 이 시대의 순교이며 순수한 희생의 모습입니다. 내가 원하는 희생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아 보이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려면, 온갖 걱정거리와 재물과 욕심들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온갖 시련을 참아내고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게 됩 니다. ‘내가 나 자신을 희생하고, 온갖 손해를 감수하고, 남을 위해 내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답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혜서에는, ‘의인들의 고난이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헛된 고생이며 파멸로 보이겠지만, 그들은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살 것임(지혜 3,1-4 참조)’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십니 다. 따라서 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환난과 역경과 박해 등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순교할 수 있는 힘도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순교자의 믿음이고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이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의 삶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나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주사목 대전모이세>
모이세는 그저 함께하고 싶습니다
가끔 대화 테이블에 ‘신부로 살면서 외롭고 서럽다 느낄 때’라는 주제가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명절에 형제들은 그들의 자녀들과 알콩달콩하며 지내는데 나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을 때’라든가, ‘사제관에 들어 갔는데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을 때’라든가, 여러 이야기에서로 공감하며 웃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외롭고 서럽다 느낀 적은 팔이 닿지 않는 등에 파스를 붙일 때였습니다. 방바닥에 파스를 깔아놓고 각도 조준(?)을 잘해서 누워야 하는데, 항상 조금씩 비켜 붙어 서럽고 짜증이 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 지금까지 아무리 아프고 쑤셔도 파스를 붙이지 않습니다.
아무튼 아마도 많은 분이 서럽거나 외로움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으며 나름 노력하며 살아가실 텐데, 타지에서의 삶은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합니다.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아프기까지라도 하면 외롭고 서럽다는 감정과 함께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미사 후, 한 명의 이주민 친구와 봉사자가 조심스레 면담을 요청합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타지에서 아프면 세상 서럽다. 건강 잘 챙겨라.”고 말하며 성모병원의 담당자와 연결해 주고 나니 얼굴이 한결 좋아집니다. 나중에 진료받았냐고 물어보니 괜찮아져서 안 갔다고 답하더군요. 말과 환경이 낯선 곳에서 아프니 아마도 많은 생각들이 밀려 왔을 테고, 담당자와 연결 후엔 아마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사자로부터 장례미사를 집전해줄 수 있냐는 문의를 받았습니다. 한 명의 어린 외국인 친구가 하느님 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고인이 된 친구를 보내며,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기 위해 모인 모이세에서 볼 수 없었던 많은 이주민 친구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이세는 이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외롭고 서럽다 느꼈을 친구들에게 언제고 함께하고 싶은 존재였던가?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던 친구들에게 언제고 그 짐을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존재였던가?
솔직히 모이세는 이주민 친구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들과 함께하면서 무거운 짐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덜어주길, 의지할 곳이 없다면 집 같진 않겠지만 그저 조금이라도 편안하기를… 외롭고 서럽고, 힘들고 어려워하는 친구들과 그저 함께이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주민 친구의 생각 속에 임마누엘 하느님처럼 ‘자신들과 함께하는 모이세’라는 친구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안성준 도미니코 신부 대전 모이세 전담-
* 모이세
첫째는 구약의 '모세(라틴어로 Moyses)를 뜻하고, 두 번째는 문화 그리고 나라의 구별 없이 모두 더불어 '모이자'는 뜻을 함의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21. 미사 해설 - 시작 예식(6) : 자비송에 대해서
미사의 시작 예식
입당 -성호경-인사-참회-자비송-대영광송-본기도
여섯 번째, 자비송입니다. 자비송은 역사적으로 로마인들이 신이나 황제 혹은 개선장군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군중의 환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군중의 환호는 “기리에 엘레이손”을 반복하며 그들을 반겼습니다. 또한 고대 동방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lesion hemas!” 하고 외쳤던 것에서도 유래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에서 미사 안에서 바치는 자비송은 “주님, 그리스도”를 향하여 바치는 기도로 바뀌게 되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환호이자, 그분이 보여주신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성경 안에서의 자비송의 근거는 마르코 복음 10장 47절, 예리코 소경의 청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마르 10,47-48).”
제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예리코 소경의 그 간절함처럼 우리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고 청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비송은 분명 전례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자발적인 고백이자 청원이며,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는 “능동적인 전례 참여”라는 관점에서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우리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의 마음을 담아 주님께 부르짖고, 자비를 간청하는 것은 자비송이 갖는 목적에 합당한 우리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현행 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52항에서는 자비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자비송은 신자들이 주님께 환호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이므로, 관습에 따라 모든이가 바친다. 자비송의 각 구절은 보통 두 번 한다.”
즉, 자비송은 주님께 환호를 올리고,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청하며, 동시에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로 봉헌하는 예식입니다. 이러한 지향점을 기억하며 매 미사 때 자비송을 노래합시다.
다음 시간에는 시작 예식 중 대영광송에 대한 미사 해설이 계속됩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교구 내 공소
안면도성당 누동리공소
누동(다락골) 공동체는 박해전·후 시기부터 어어져 오다가 1891년경 퀴를리에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자수는 28명이었다. 1927년경 강덕원 (베드로) 회장이 사비를 들여 지역 어린이들의 문맹퇴치를 위한 강습소를 개소하였다. 1962년에 한식목구조 공소(20평)를 건축하였고, 현재의 벽돌조 공소(연면적 156.35㎡)는 1981년 건축하고 황민성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이 있었다. 주로 어업에 종사하던 교우들은 1980년대 전후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생계 터전을 잃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2001년 안면도본당이 설립되었고, 현재 공소에서는 월 3회 주일미사가 있으며 23세대 40명의 신자 중에 25명이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논산대건중.고등학교
교목 신부 이야기-여섯번째
안녕하세요. 논산대건중·고등학교 교목 정동수 야고보 신부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신부님으로서의 제가 필 요한 순간 외에도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생길 때 저를 찾습니다. 교실 문이 고장 났을 때는 물론이고 수업 중 스피커에서 소리가 안 날 때도 선생님께 ‘신부님을 모셔 올까요?’라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선생님들도 컴퓨터 나 음향 장치 등의 설비 관련해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 제가 있으면 저를 찾아오십니다. 작년에 중학교에 부임할 때 교장 신부님께서는 저를 선생님들께 소개하시면 서 ‘정가이버’라고 이야기하시기도 했는데, 저와 함께 하는 우리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은 정말로 그렇다는 것 을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옛말에 ‘재주가 많으면 빌어먹는다.’고 했는데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는 그 재주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나 큰 일에서나 요긴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노후화된 시설로 인한 크고 작은 곤란함도 해결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좋은 환경과 편리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그 재주를 쓰고 있습니다. 작년 2학기부터는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중학교 교실 두 곳을 손보았습니다. 온라 인 스튜디오도 새로이 꾸며서 학생들이 방역을 지키며 안전하게 학급 단위에서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지 요. 영상을 활용한 다양한 수업 기법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실에 편리한 전자 칠판 기능을 추가하여 환경을 재정비했습니다. 올해도 역시 교 육청의 지원을 받아 우리 학생들이 좋은 교육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여러 교실의 장비와 기 자재를 확충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여름방학에도 교실 두 곳을 리모델링하랴 연수 받으랴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었지요.
교목 신부가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느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비자 교리나 학생들과 선생님들 면담, 교목 신부만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운영과 담당 과목 수업 등 교목 신부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많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가이버’가 하는 그 일들 은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런 수고로움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다면, 무엇보다 저 역시 그 일 안에서 기뻐하고 보람을 느낀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모습이 제게 주어진 탈렌트를 다방면으로 잘 활용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가끔은 문득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는 사제로서의 모습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며 그들을 고쳐주시고 위로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보듬는 그런 사제 말입니다(루카 4,40 참조).
어느 선생님께서 카드에 예쁜 글씨로 “사제의 기도”를 담아 전해주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텅 빈 방 홀로 앉아 당신을 마주합니다. 오늘도 알 수 없는 고독이 저를 괴롭힙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겸손히 응답함으로 보잘것없는 제가 당신의 사제로 살아갑니다. 모든 이를 섬기는 이 길이 문득 버겁기도 하지만 당신만이 나의 희망이시니 당신께 나아갑니다. 제 입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의 축복을 전하게 하소서. 제 발이 당신 계신 낮은 곳에 닿게 하소서. 제가 사랑을 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이 길이 문득 두렵기도 하지만 당신만이 나의 구원이시니 당신께 나아갑니다.” 오늘도 교무실 책상에 붙어 있는 “사제의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을 바라보며, 주님께 순간순간 무엇보다 ‘사랑을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 봅니다.
-정동수 야고보 논산대건중.고등학교 교목 신부-
<1분 교리>
Q-1) '영광송'이란 무엇인가요?
A) '영광송(영광송)'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영광송은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하여 시작되는 '대영광송'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며 바치는 '소영광송'으로 구분됩니다.
대영광송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부른 찬미가(루카 3,4 참조)에서 유래되었으며, 대림절과 사순절을 제외한 모든 주일과 축일, 대축일, 특수 행사에서 하느님께 바칩니다. 소영광송은 성삼위를 찬미하는 기도로서 모든 기도의 끝에 바칩니다.
침수
완연한 가을입니다. 높은 가을 하늘은 정말로 아름답네요.
이 가을 아름답기만 하지 않는 분들이 있죠? 침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분들일 텐데요. 명절을 앞두고 자연재해로 인해 재산과 귀중한 생명까지 잃는 분들과 가족들은 정말로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이런 자연재해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우리 앞에 있는 자연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보고 잘 살피는 자세가 중요하지는 않을까요? 아래는 침수 시 국민 행동 요령입니다.
우선 반지하 주택, 지하 역사상가, 지하 주차장 등 지하 공간에 있을 때는 바닥에 물이 조금이라도 차오르거나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할 때 즉시 대피해야 한다. 또 문밖 외부 수심이 무릎 이상까지 올라오면 혼자서는 현관문을 열 수 없게 되는데, 이럴 때는 전기 전원을 차단한 후 여러 명이 힘을 합쳐 문을 열고 신속히 대피해야 한다.
지하 주차장은 물이 조금이라도 차오르면 차량을 두고 즉시 대피해야 한다. 행안부는 주차장으로 빗물이 유입되기 시작하면 차량을 밖으로 이동하는 것은 금지하도록 권고했다. 집중호우로 차량이 침수되기 시작하면 타이어 3분의 2 이상이 잠기기 전에 차량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타이어 3분의 2가 물에 잠기면 차량 엔진룸으로 물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차량이 침수된 상황에서 외부 수압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으면 운전석 목받침을 분리해 목받침 하단 철재봉으로 유리창을 깨서 대피해야 한다. 유리창을 깨지 못한 경우 차량 내. 외부 수위 차이가 30cm 이하가 될 때까지 기다린 후 차량문이 열리면 탈출한다.
침수가 시작된 지하도차도나 급류가 흐르는 교량은 절대 진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진입하였을 때 차량을 두고 신속히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 만약 급류에 차량이 고립되면 급류가 밀려오는 반대쪽 문을 열고 탈출하고, 문이 열리지 않으면 창문을 깨고 탈출한다.
아파트, 빌라 등 공동주택에서는 평상시 차수판을 설치하고 모래주머니, 양수기 등을 공동주택에서는 평상시 차수판을 설치하고 모래주머니, 양수기 등을 비치하고, 비가 오면 차수판과 모래주머니를 신속히 설치할 수 있도록 수방 자재 설치자를 사전 지정해야 한다. 많은 양의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면 신속하게 차수판과 모래주머니를 비가 유입될 수 있는 입구마다 설치한다. 또 지하 공간 빗물이 들이치면 지하 거주자와 이용자가 대피하도록 안내하고 차를 빼기 위한 지하 주차장 진입은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
행안부는 "이번 행동 요령을 시작으로 상황별 더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내용을 보완해 지속적으로 전파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 사회복음화 분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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