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을 쌓는 <사춘기 문예반>,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박규옥
읽다가 덮어둔 장정희 선생님의 <사춘기 문예반>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이 책 속에 무슨 답이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상처 받은 선우는 또래 아이들이 칭찬하는 친구의 글을 위선적이라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로 현실을 왜곡시키는 억지소리라고 말하는 아이다. 그러면서도 문예반을 벗어나지 못한다. 선우는 문예반 아이들이 맹신하는 문쌤을 '사악한 교주'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카페에 글을 쓴다. "그의 치명적인 매력은 자신이 교주임을 모른다는 것, " 자신도 문쌤의 매력에 빠져 있지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 한참 책을 펴지 않았다. 선우, 문쌤,내 얘기 같았다.
학교 작은 도서관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까 봐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학교가 단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도서관이 있어서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3이 되었다. 고2 겨울 방학이 끝나고 반을 나누고 새 학년을 준비하는 2주 동안 나는 학교를 가지 않았다. 계속 안 가서 학교를 그만둘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버렸다. 봄 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이 되는 날, 엄마한테 쫓겨 학교엘 갔다. 고1 때도, 그래서 고2 때 내 번호는 재일 꼴찌였었다. 키순서로 번호를 정하는데 크지도 않으면서 재일 꼴찌 번호를 받았으니 뒷자리에 짱 박혀서 빌려온 소설 읽기는 좋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고3 담임은 봄 방학 하기 전에 반 편성이 끝나 번호를 정해 이미 만들어진 출석부를 덮더니 아이들 전체를 복도에 줄을 세웠다. 내 번호는 18번이 되었고, 선생님은 서기라는 애한테 출석부 명단을 다시 적으라고 했다.
"한 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일 년 내내 번호로 낙인찍힐 친구를 배려하자. 잠깐 불편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이해해라."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일 년 내내 번호로 낙인찍힐 친구가 나였다. 선생님은 배려라고 했지만, 나는 선생님과 말도 하지 싫어서 매번 피해 다녔다.
어버이날 전날이 토요일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카드나 선물은 닭살 돋는 갈롱스러운 행동이라 생각하는 게 우리 집 식구들이다. 어쩌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사랑하는 친구 어쩌구 하면 우리 자매들은 그 애가 돌아가고 나면 "재 원래 저렇게 갈롱스럽냐?" 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나도 어버이날 선물을 사러 가는 애들을 따라 나섰다. 땡땡이치는 핑계치고는 괜찮았으니까, 그러다 교문 근처도 못 가서 담임을 만났다. 얘들이 어버이날 선물 어쩌구 하는데, 담임은 나만 콕 찍어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토요일 오후, 대부분의 선생님이 퇴근한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면담을 하게 된 것이다.
"너의 집 어려운 거 내가 다 안다.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너의 집이 나아질 수 있수 건 네 어깨에 달렸다. 올해 잘하면 너는 분명히 네 집의 든든한 기둥이 될 거다."
내 손을 잡고 얘기하는 선생님한테 나는 "저 내일부터 학교 안 올래요." 해버렸다. 그 절실함이 싫었다. 그때 선생님이 출석부로 머리를 한 대 툭 치면서 까불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으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선생님이 눈물을 흘렸다. 노총각 문학 선생님의 갈롱스런 순물 때문에 나는 학교를 그만 뒀다. 왜 그랬냐고 물으면 우리 담임이 나 키워서 결혼하려고 그러는 거 같아서,라고 둘러댔다.
책을 읽으며 선우에게 빙의됐었다. 문쌤의 관심이 선우를 더 어긋나게 할까 봐 조마조마 했다.
"뭐든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보태마,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고 생각해 주렴."(228P)
학교를 안 간다고 버틸 때, 담임선생님을 오락실 앞에서 만났다. 길 옆 가로수 나무 아래 둘이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던 선생님이 내게 할 얘기가 없다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했다. 그때 오락실에서 우리 반 정희가 나와 선생님을 보고 인사를 하자, 선생님은 일어서며 "네 맘대로 사는 건 내가 말리지 못 하겠지만, 우리 반 애들까지 물들이지는 말아라."하고 가버렸다. 정희를 오락실로 끌고 다닌 것이 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은 반대였는데...
개새끼가 처음부터 그 말을 하지 괜히 생각해 주는 척 갈롱 떨고 지랄했네. 학교를 그만 둘 명분을 얻었다는 듯 나는 당당해졌었다. 그리고 학교 근처는 삼십 년 가까이 피해 다녔다.
그런데, 그날 길바닥에서 한 동안 앉아서 말이 없던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은 그거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 도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다.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고 생각해 주렴!"
글쓰기를 통해 십대들이 따뜻하게 연대하고 우정을 쌓는 <사춘기 문예반>이 해피엔딩 이어서 좋았다.
"언젠가 한겨울 시골 장터에 갔다가 촛불을 넣은 깡통을 깔고 앉아 시린 엉덩이를 덥히고 있는 노인을 봤다. 뭉클했다.
촛불 한 자루의 힘!
글쓰기가 혹한의 겨울 같은 세상을 건너갈 아이들의 가슴에 온기 어린 한 자루의 촛불이 되어 주길."(글쓴이의 말. 271p)
그때 우리 담임선생님 마음도 저랬을 건데...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던 18살의 내가 이제야 선생님께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내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니까."
장정희 선생님 글 잘 읽었어요. 읽는 동안 제가 위로를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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