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이신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다
헨리 나웬
연민의 하느님
참으로 기쁜 소식은 하느님이 멀리 있는 하느님이 아니며, 두려워하거나 피해야 할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는 하느님이고 인간 투쟁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이분은 연민의 하느님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 되기로 선택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게 되자마자 우리는 그분과 새로운 친밀함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연대해서 살고, 우리의 즐거움과 고통을 나누고, 우리를 옹호하고 보호하며, 우리와 함께 삶의 모든 것을 아파하며 살기로 투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은 가까이 있는 하느님이며,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요새, 우리의 지혜 그리고 더 친숙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조력자, 우리의 목자, 우리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이다.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연민의 하느님을 결코 실제로 알지 못할 것이다.(<연민>에서)
하느님, 우리의 어머니
렘브란트 그림, <돌아온 아들>에서 천막 혹은 날개 같은 아버지의 겉옷을 볼 때마다 나는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어머니 같은 자질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내 마음은 시편 작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말들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네."
그분께서 새집이의 그물에서
위험한 흑사병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그분의 진실은 큰 방패와 갑옷이라네.
(시편 91,1-4)
그러므로 오랜 유대의 가부장제에서도, 아들을 집에 받아들이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돌아온 아들 위에 몸을 구부리고 그의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노인을 렘브란트 그림에서 지금 다시 바라보면서 "아들을 팔에 껴안는"아버지를 느끼기 시작 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쓰다듬고 자신의 따뜻한 몸의 체온으로 그를 감싸주며 그가 태어난 움으로 끌어안는 어머니를 느낀다.
렘브란트, 돌아온 아들
이처럼 '돌아온 탕자'는 하느님의 움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고, 존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모습은 또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니고데모에게 권고했던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제 나는 이 하느님의 초상에서 지극한 한결같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는 감상주의, 낭만주의, 행복의 종말을 담은 평이한 이야기가 없다. 그저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을 본다. 자신의 모상대로 지은 존재를 다시 자신의 움 속으로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거의 보이지 않는 눈, 손, 겉옷, 구부린 몸, 이 모든 모습을 거룩한 어머니의 사랑, 슬픔, 갈망, 희망 그리고 끝없는 기다림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신비는 하느님이 어머니 같은 무한한 연민으로 영원히 당신 자신과 당신 자녀들의 생명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인 하느님은 피조물에 의존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했고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다. 이 선택 때문에 자녀들이 떠날 때 어머니 하느님의 슬픔이 일어난다. 그들이 돌아올 때 어머니 하느님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어머니 하느님의 기쁨은 당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모든 이들의 집으로 돌아오고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잔치상에 함께 모일 때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어떤 거부도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사랑 그리고 모든 거부들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사랑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버지이며 어머니이기도 한 하느님의 첫째 사랑 그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부서지기 쉬운 하느님>에서)
하느님, 부재 속의 현존
하느님은 "그 너머", 우리의 마음과 정신 그 너머에, 우리의 느낌과 생각 너머, 우리의 기대와 욕망 너머, 그리고 우리의 살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건과 경험 너머에 있다. 그러나 그 분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의 핵심에 닿게 되는데, 왜냐하면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부재(없음)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절대로 그분의 부재와 떨어지지 않으며 하느님의 부재 역시 그분의 현존과 절대로 갈라지지 않는다.
그분의 현존은 인간적 차원에서 함께 있음에 대한 체험과 너무나 다르고 그것을 넘어 서기 때문에 쉽사리 부재로 인식된다. 다른 한편, 그분의 부재는 너무나 자주 깊이 느껴지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현존으로 감지된다. 이러한 현상은 시편 22-1-5에서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리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저희 선조들은 당신을 신뢰하였습니다.
신뢰하였기에 당신께서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있어 정점이기도 하다. 예수가 이 말을 십자가 위에서 했을 때, 전적인 외로움과 온전한 받아들임이 서로 만났다. 그 완전한 비움의 순간에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채워졌다. 그 어둠의 시간에 새로운 빛이 나타났다. 죽음의 증언이 나타났을 때 생명이 확인되었다.
하느님의 부재가 크게 소리치며 표현되는 곳에서 그분의 현존이 가장 심오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이 그분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의 부재를 가장 고통스럽게 체험하는 우리들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분명히 현존하게 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이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발돋움하기>에서)
예수, 숨겨진 하느님
예수는 숨겨진 하느님이다. 그분은 작고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인간 존재가 되었다. 그분은 태어난 나라의 권력가들로부터 모욕을 받았고 두 범죄자 사이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해졌다.
예수의 삶에는 대단한 것이 없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의 기적을 보아도, 그분은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다시 살리지 않았다. 그분은 자주 기적을 입은 사람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요구했다. 그분의 부활도 숨겨진 사건이었다. 오직 그분이 죽기 전부터 그분을 친숙하게 알아왔던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과 남자들만이 그분을 부활한 주님으로 알아보았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세계 주요 종교들 중의 하나가 되었고 수백만 사람들이 매일 예수의 이름을 말하므로 예수가 숨어 있는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삶도 죽음도 부활까지도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비천하고 숨겨져 있고 거의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되었다.
나는 복음 세계에서, 예수가 결실을 맺는 어느 곳에서나 이 숨겨짐이라는 특징과 마주치게 되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충격을 받는다.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숨겨져 있기를 갈망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베네딕도는 수비아코 골짜기에,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외곽 카르체리에, 이냐시오는 만레사 동굴에, 소화 데레사는 리지와의 가르멜 수도원에 자신들을 숨겼다. 거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당신은 그들에게서 숨겨짐, 은둔에 대한 깊은 갈망을 느낀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것을 잊어버리지만, 바오로 사도 역시 설교의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2년 동안 광야에 머물렀다.
수많은 위대한 정신과 영의 소유자들이 너무 쉽게 혹은 너무 빠르게 대중에게 누출됨으로써 그들의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느끼지만, 우리의 세계가 끈질기게 "알려지지 않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큰 거짓말을 선포하고 있기에 쉽사리 잊어버린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직관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세상의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에 조심스럽게 호의를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숨겨진 현존을 더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즈베니고로더의 구세주
이제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를 바라보자. 당신은 온갖 형태의 인기를 그분이 일관되게 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는 항상 하느님이 비밀스럽게 그분 자신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만일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 역설 속으로 들어간다면 당신은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마르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눈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하느님과 모든 인류를 보는 것이다. 이 신비는 나에게 예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일으킨다. 수세기 동안 셀 수 없는 이미지들이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어떤 것들은 나에게 예수의 얼굴을 보도록 도와주었고 또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그리스도의 이콘을 보았을 때 나는 결코 번에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을 느꼈다. 나의 눈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축복 받았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15세기 초 러시아의 즈베니고로드 시에 있는 한 교회에 설치할 이콘들을 만들면서 이 그리스도의 이콘을 그렸다. 그래서 이 이콘은 자주 '즈베니고로드의 구세주'라고 불리운다.
이렇게 그분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강생 신비의 핵심으로 이끌어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살 수 있다! 예수의 눈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눈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느님을 보는 것 말고 그것보다 더 큰 갈망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을 것인가? 필립조 사도와 함께 우리의 마음은 외친다.? "주님, 우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대답한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잇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8-10)
예수는 하느님을 온전히 계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며..."(골로 1,15), 예수의 눈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이 채워진다. 이 신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는 육화한 말씀의 눈이 어떻게 모든 보여지는 것들을 응시하며 참으로 품어 안느지 느껴보려고 애써야 한다.
루블료프의 그리스도의 눈은 요한 묵시록에 서술된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의 눈이다. 그분의 눈들은 거룩한 존재의 신비를 꿰뚫는 불길의 화염과 같다. 그 눈들은 맹렬하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얼굴을 지닌 존재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묵시 1,14; 2,18; 1,16;19, 12-13)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존재의 눈이다.
그 눈은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이요. 만들어지지 않고 낳은 존재요, 아버지와 하나인 존재... 모든 것들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진"(니체아 신경) 존재의 눈이다. 그분은 참으로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창조된 빛이다. 하느님이 빛에게 어둠으로부터 갈라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던 첫째 날의 빛(창세 1,3)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또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새로운 날의 빛이며, 어둠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빛이다.(요한 1,5)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빛나게 만드는 참다운 빛이다.(요한 1,9) 참으로 빛을 보고 있는 유일한 존재, 그래서 그 본다는 것이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유일한 존재의 눈을 응시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느님의 한계 없는 선함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존재가 세상에 왔고, 그 선하심이 인간이 죄악으로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으며, 연민으로 애간장이 끓었다. 하느님의 마음을 응시하고 있는 그 똑같은 하느님의 백성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보았고 울었다.(요한 11,36) 이 눈은, 하느님의 내면을 꿰뚫는 불꽃같은 이 눈은 또한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슬픔에 대해 바다 같은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안드레아 루블료프가 그린 그리스도의 눈이 지닌 비밀이다.(<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며>에서)
[원출처' <Henri Nouwen> (Robert A.Jonas, Orbis. 1998)
[출처] <참사람 되어>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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